역사는 실무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보통 ‘과장’ 쯤의 직급을 달고 있는 중간관리자들 말이다. 위에서 시키면 군소리 없이 해야 할뿐더러 동시에 아래를 다그쳐야 한다는 데 그들의 비애가 가로놓여 있다. 보스는 그저 비장하게 명령하고 폼나게 총을 뽑으면 그만이지만, 지저분한 ‘설거지’는 고스란히 실무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런데 실무자는 로봇이 아니다. 사람이다. 일년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격무에 시달리는 제 신세에 화가 나고, 애초에 기대한 ‘공공의’ 그것이 아닌 지극히 ‘사사로운’ 업무내용에 짜증스럽다. 사는 게 권태롭다는 듯 언제나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 다니는 샐러리맨. “아우 귀찮아. 인생 뭐 있냐”라고 잠꼬대할 것 같은, ‘그때 그사람들’의 주 과장은 그런 인간이다.
1979년 10월26일, 그 깊은 가을 밤. 그는 일생 최대의 소동에 휘말린다. 직속상관이 모종의 결심을 했다. 이유를 캐물을 새도 없다. 사회생활하다 보면 어떤 줄에 서 있느냐가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 있고, 사실 그것은 그리 드문 경우도 아니다. 하긴 결정적 순간에 줄을 이탈해 도망가느니, 까짓거 일단 끝까지 가보는 편이 훨씬 쉽고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상황을 단순하게 생각하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직접 친구를 쏴 죽이게 될 줄은 차마 몰랐을 확률이 높다. 정책을 결정하거나 거사를 도모하거나 다음 세대를 염려하는 것은 어차피 실무자의 의무가 아니므로. 그의 임무는 다만 시체들의 확인사살을 지시하는 것, 공포에 떠는 목격자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입단속을 시키는 것,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연회의 대가인 돈봉투를 챙겨 피 묻은 손으로 건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본인이야 지긋지긋하든 말든 뼛속까지 책임에 충실한 실무자의 전형이다.
불행히도, 거사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움직일 방향을 처음으로 혼자 결정해야 한다. 광화문의 새벽 도로는 파리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다. 그의 자동차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그 넓은 길을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고 또 돌 뿐이다. 미로 혹은 미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뻥 뚫린 대로를 헤매 도는 자동차를 카메라는 높은 곳에서 멀뚱멀뚱 내려다본다.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고 믿는 자는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리면서 또 한손으로는 제 이마에 권총을 겨눌 수밖에 없다. 물론 대개의 나약한 인간이 그렇듯 그도 도저히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한다. 운명은 그렇게 또 한번 자기통제의 과녁을 비껴간다.
모든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역사다. 역사는 영웅 대(對) 반영웅의 구도로 사건을 기록한다. 세상이 바뀌어 역사의 해석이 뒤집힌다 해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실무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영웅도 반영웅도 아닌,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그때 그 사람들’의 실존은 시간의 갈피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조용히 잊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