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황당한 죽음의 소식 이후 자주 듣게 된 말이 있다. “은주 때문이야!” 원인 모를 우울모드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내뱉는 말이 ‘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은주가 우울을 가져왔는지, 은주를 빙자한 각자의 속앓이인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우울하고 싶어라! 쯤은 아닐까. 은주가 떠난 세상에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일요일 오후 홀로 두 편의 비디오를 때렸다. <돌로레스 클레이븐>과 <조지아>. 나이 든, 1962년생의 미국산 이은주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정말 은주가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소설사에 영화사에 혹은 진짜 인생극장에 그리 흔치 않은 은주들, 은주류의 전통이 있다. 돌로레스의 딸 셀리나, 조지아의 여동생 새디, 또는 그녀의 다른 영화들, 그러니까 <위험한 독신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등등에 키 작은 이은주, 제니퍼 제이슨 리가 등장한다.
그녀들로 충분했던 세상의 스크린, 김빠진 팝콘들이 굴러다닌다
은주와 제니퍼 제이슨 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억지일는지 모른다. 도대체 닮은 구석이 뭐가 있는가. 죽는 연기? 세컨드 베스트의 위상? 그냥 왠지 비슷한 느낌?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여배우의 모습은 내가 출연한 실제의 인생극장에서 맞닥뜨린 여성과 동종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자의식’이라고 부른다. 쉽게 잘 부서지는 딱딱한 견과류 껍데기. 그게 바로 자의식 과잉의 성분이다.
화면에서 마주치는 제니퍼 제이슨 리는 언제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대개가 인생막장의 배역을 맡고 있지만 그 팔자, 그 신세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안겨주곤 한다. 그녀는 세상의 가해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지만 그 철저히 무너지고 망가지는 모습으로 세상을 조롱한다. ‘FUCK YOU!' 앙다문 입술로 그녀가 자주 외치는 대사가 이것이다. 도대체 너 왜 그러니 은주야….
더 이상 여자를 사귈 수 없게 되었다. 몇 해 후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일까, 마주치는 여자들이 일단 안심을 하고 대해 온다. 그렇듯 안심하는 표정에는 날 선 자의식이 담겨있지 않다. 차라리 무성(無性)에 가깝다. 할아버지가 되면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남자가 되어 여자를 사귈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여자들 혹은 제니퍼 제이슨 리 또는 이은주들과 언제나 싸웠다. 싸움의 소재, 싸움의 배경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만큼 유치한 것들이다. 정말 짜장면을 먹을지 라면을 먹을지를 놓고 다퉜던 기억도 있다. 김대중이 좋다 싫다를 놓고 죽도록 다투다 원수처럼 헤어진 여자도 있다. 만남으로 시들어가는 꽃, 나는 물주는 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애로운 할아버지가 불쑥 되고 말았다.
은주는 가고 제니퍼는 늙었다. 웬일일까, 차라리 후련해지는 느낌. 아마도 이제 다른 자의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들로 충분하기로 결정한 세상의 스크린에 비가 죽죽 내리고 의자는 삐꺽거리고 김빠진 팝콘들이 굴러다닌다. 변두리, 삼류, 동시상영, 그래 다 좋다, 자애롭게.
삐쭉빼죽한 자의식의 표출은 내게 환상과 환멸의 두 얼굴을 동시에 펼쳐 보여주었다. 그런 성향을 사랑하기는커녕 지긋지긋해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지긋지긋함만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명으로 회복하기에 이생은 너무 짧다. 부러질 때 부러지지 않은 가지, 떨어질 때 떨어지지 않은 이파리는 추악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