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중계된 아카데미 시상식에 재미있는 인터뷰 장면이 삽입돼 있었다. 사회자인 크리스 록이 시상식 전 일반인들을 만나 지난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를 묻는 것이었다. <리딕>,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화이트 칙스> 등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만 대답으로 나왔고 주요 후보작들을 봤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인물로 지적인 인상의 한 남성이 등장했다. “<에비에이터> 봤나요?” “예”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예”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예” “(놀란 크리스 록) 혹시 <화이트 칙스>는?” “(갑자기 엄지 두개를 치켜 올리며) 올해 최고의 영화죠.” 대중에서 멀어져 가는 대중영화의 축제 아카데미의 위기감을 재치있게 풍자한 코믹 인터뷰였다.
아닌게 아니라 올해는 예년과 달리 아카데미 후보작들의 흥행성적이 매우 저조했다. 작품상 후보작 5편 중 1억달러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가 없는 것도 15년 만에 처음이고 시상식 1주일 전에 5편 전체가 미국에서 올린 수익 3억1500만달러도 지난해의 반토막이 안되는 수치였다. 전통적으로 흥행에 중요 변수로 작용해온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사라져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국 극장가는 더 하다. 지난 18일 후보작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한 <에비에이터>는 3월1일까지 전국 56만의 관객을 모았다. 개봉 당시만 해도 아카데미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후광에 비하면 그리고 <콘스탄틴>, <숨바꼭질> 같은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면 별볼일없는 성적이다. 같은 주 개봉한 <사이드웨이>는 일주일 뒤 간판 건 극장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참패했다. 초라해진 아카데미의 역할은 상영관 규모에서도 드러난다. <레이>와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각각 전국 70개관, 50개관으로 한국영화로 치면 저예산 영화들에게 해당 되는 ‘소박한’ 밥상을 차렸다.
10일 개봉하는 작품상 수상작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170개관으로 비교적 큰 판을 벌였지만 이 역시 아카데미 후광과는 별 상관없다는 게 홍보사인 시네와이즈필름의 이야기다. 시네와이즈필름은 “수상결과를 작품의 신뢰도 확보 정도로 생각할 뿐 이전처럼 아카데미 수상을 바로 마케팅 포인트로 잡을 수 없는 게 요즘 극장가”라고 말했다. <아메리칸 뷰티>(2000)처럼 비교적 대중성이 떨어지는 내용의 영화도 아카데미 수상을 통해 서울 40만 관객을 확보하던 시절은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이야기가 되간다는 말이다.
칸이나 베를린 등 예술 영화제의 수상은 도리어 흥행의 악재가 돼 최근에는 수상사실을 아예 숨기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상업영화의 선택에 있어 ‘안전판’ 역할을 하던 아카데미마저 그 자리를 잃어버리는 최근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 그대로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선택의 지침서들이 점점 왜소해져간다는 건 그만큼 관객이 무엇을 볼까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간다는 의미임에는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