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하의 C&C]
[백은하의 애버뉴C] 15th street /환상의 2인조 밴드의 장기 투어 콘서트
2005-03-04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최고의 동료, 리차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를 만나다

‘동료’는 ‘친구’와 다르다. ‘친구관계’란 자고로 하등 인생에 도움이 안되더라도 묵묵히 감싸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면, ‘동료관계’는 그보다는 훨씬 서로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친구관계 맺는 법만 배우다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물론 동료와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고, 많은 것을 공유하다 보면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동료에게서 친구에게서 구할 애정이나, 관심을 기대하다가 상처 받기도 하고, 반대급부로 너무 사무적으로 대하다가 회사생활에 허무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인간적으로 너무 싫지만, 함께 일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동료도 있었고, 인간적으로는 참 좋지만, 일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동료도 있었다. 그러니 최고의 동료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인 셈이다.

MoMA (뮤지엄 오브 모던아트)는 재 개관 이후 꾸준히 ‘위대한 동료들’ (Great Collaborations)란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영화작업에서 최고의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두 사람을 불러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인데, 이미 <펄프픽션> <킬 빌>에서 호흡을 맞춘 ‘우마 서먼과 쿠엔틴 타란티노’, <어바웃 슈미츠> <사이드웨이>의 감독, 시나리오작가 콤비인 ‘알렉산더 페인과 짐 테일러’ 등이 이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은 마침내 ‘리차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 의 차례가 돌아왔다. 바로 전날 L.A.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함께 뉴욕으로 날아온 이 귀여운 두 남자는, 답답한 검은 턱시도보다는 편안한 캐쥬얼 차림이 훨씬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비포 선셋>에서 너무 앙상한 얼굴을 보여주어 여러 처녀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던 에단 호크는 이제는 조금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왔고,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약간 나른한 듯 보이지만 순간 순간 영민함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리차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 하면 대부분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센셋>만을 기억하겠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 사이에도 쉬지 않고 이어졌었다. 은행털이 소동극 <뉴튼 보이즈>나 저예산 영화 <테이프>, <웨이킹 라이프>에서 줄리 델피와 침대에 누워 ‘환생’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기까지 에단 호크는 링클레이터와 벌써 5작품을 함께 했다. 10여 년 전 에단 호크가 리차드 링클레이터로부터 처음 받아 든 <비포 선라이즈>의 시나리오는 유럽여자가 미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남자를 만난다는 설정이었다. “뭐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사실 처음 시나리오는 정말 정말 나빴어요. (웃음) 무슨 영화가 독백만 안 쉬고 몇 장씩이냐 구요, 그건 정말 철학노트였지,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니까요(웃음)” 하지만 그는 “동시대의 감독과 소통하면서 영화를 찍는다는 기쁨”에 단지 배우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파트너로 이 영화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지가 비엔나로 바뀌었고, 오고 가는 생생한 대화들이 배우들의 화학작용 속에 서서히 수정되었다. 그렇게 이들의 ‘빛나는 협력’은 9년 후 파리에서의 재회를 가능케 만들었다.

사실 ‘위대한 동료들’ 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아래 진행된 행사였지만, 에단 호크와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우애를 과시 못해 안달인 그런 친구들은 아니었다. 애틋한 존경의 눈길을 서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눈을 아래로 돌렸을 때 푸핫- 웃음이 새어 나왔다. 테이블 아래 놓인 그들의 발은, 마치 짠 듯이 똑같았다. 오른발을 왼발위로 올리고 까딱까딱 발장난을 치고 있는 그들은 마치 발이 4개 달린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한 몸에서 나올 법한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는 저 발들을 보고 있으려니, 저런 게 통한다는 거로군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580장의 세부적인 계약서로도, 수천 수만 번의 리허설로도 맞출 수 없는, 우주에서 내려준 ‘궁합’이란 것일 테다.

이들이 현재 진행중인 영화를 보려면 아직도 1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2년 전 첫 촬영에 들어간 ‘12년 프로젝트’는 한 소년의 7살부터 18살까지, 12년의 삶을 ‘리얼타임’으로 찍어가는 영화다. 일년에 몇 일간, 12년간 촬영을 할 것이라는 이 기록영화에 가까운 길고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물론 에단 호크도 함께 한다. ‘해가 떠오를 때 까지’ 비엔나 거리를 배회하던 스물 다섯의 에단 호크는, 서른 넷에 ‘해가 지기까지’ 파리의 골목을 걷었고, 마흔 다섯이 되면 한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른으로 우리 앞에 늙어가는 모습을 허락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료란, 협력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링클레이터는 “각자 다른 악기를 들고 다른 소리를 내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밴드 같다”고 에단 호크는 “무언가를 함께 찾아나가는 관계” 라고 말했다. 세상과 관계에 대한 철학적 호기심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 ‘2인조 밴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연출하면서, 연기하면서, 그렇게 함께 늙어가게 될 것이다. 흰머리가 늘어가는 것을, 이마에 “상처 같은”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계속 무언가를 함께 찾아나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그런 동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동아리’라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으며 매주 한 번씩 냄비받침으로 써도 끄덕 없을 두꺼운 주간지를 함께 만들어 냈던, 그 때 그 사람들.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홀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오늘 밤, 갑자기 그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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