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500만 관객 눈앞 <말아톤> 정윤철 감독
2005-03-08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나도 너도, 초원이가 되었기에…
정윤철 감독

사실 <말아톤>의 ‘대박’을 예견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순제작비 28억원의 ‘작은’ 영화 <말아톤> 앞에는 흥행사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2>,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낳았던 <그때 그사람들>, 아카데미 화제작 <에비에이터> 등 막강한 적수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개봉 한 달 뒤(3월1일) <말아톤>은 유일하게 관객 400만명 고지를 넘어섰고 이제 500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6일 오후 첫 영화에서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답안을 제출한 정윤철(34) 감독을 만났다.

200만명 이상은 예상못했는데…
좋은 영화엔 좋은 시나리오 필수,
연출 준비과정 관행 바꿔야 해요

<말아톤>의 성공요인은 단순하지만 특이하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안정된 연출력이라는 ‘정답’ 외에 다른 걸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문의 영광>이나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신인 감독의 흥행작들이 따라갔던 트렌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대작 영화들이 내놓는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소박한 가족 드라마 <집으로…>의 성공과 겹쳐볼 수 있지만 <말아톤>이 끌고 가는 감정의 굴곡은 <집으로…>보다 훨씬 절제돼 있다.

“운이 좋았죠. 가편집본을 평소 친하던 봉준호 감독과 임필성 감독에게 보여줬어요. 같이 보던 가족들이 더 좋아하더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200만명 이상은 예상 못했는데, 이렇게 터진 건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말고도 요즘 분위기나 관객들의 요구 같은 플러스 알파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지만 재학 시절 연출의 기초를 공부하기보다는 주로 카메라를 들고 시위 현장을 누비며 ‘들고 찍기’부터 배웠다는 그는 졸업 뒤 단편 <기념촬영>(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상 수상)과 <동면>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각각의 작품에서 성수대교 붕괴, 외환위기라는 악몽 같은 현실을 어두운 톤으로 화면에 담았던 그의 첫 장편이 따뜻한 휴먼드라마라는 건 좀 의아할 수도 있다. “본래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기념촬영>도 비극적인 사건에 기초하고 있지만 문제를 고발하기보다 떠난 이를 잊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의 정서를 다룬 영화였기 때문에 <말아톤>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인 라세 할스트룀의 <길버트 그레이프>나 <빌리 엘리어트> 같은 작품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고요.”

‘실화’와 ‘장애’라는 소재는 시선을 끌기 좋지만 그 시선에 담긴 소재주의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정 감독이 가장 고민했던 것도 이 부분. “속된 말로 눈물 짜내기 좋은 소재였고 그만큼 식상하게 보이기도 쉬운 이야기였죠. 코치나 엄마를 전면에 내세우면 아마 눈물이나 울컥함을 끌어내기는 더 쉬웠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관객이 초반 한시간은 초원이와 가까워지고 후반 한시간은 초원이에게 들어가 하나되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초원이의 ‘자립’을 중심에 놓으면서 슬프거나 감동적인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는 성장이야기로 끌고 간 게 유효했다고 봅니다.”

그는 <말아톤>으로 ‘신인 감독답지 않은 연출력’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신인답지 않다’는 말에는 사실 칭찬과 아쉬움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인물이나 이야기의 깊이를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지 못했다라면 그건 아직 미숙함이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지만 ‘파격’은 스스로가 경계했던 부분이다. “제대로 된 정통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전성기 피카소나 반 고흐의 회화양식은 분명 틀을 깨는 혁신이었지만 초창기에 그들은 정확한 묘사 같은 전통 회화양식에 충실했고 그 단계를 밟았기 때문에 실험도 성공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아직은 기본에 충실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캐릭터가 잘 살아 있는 드라마의 규칙 안에서 내 목소리나 스타일을 접목하고 싶고요.”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그는 다음 작품으로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아서 연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1년 반에 걸쳐 <말아톤>의 시나리오를 직접 완성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뜻밖이다. “시나리오는 지도 같은 거죠. 아무리 복잡한 길이라도 제대로 된 지도가 있으면 목적지에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요. 좋은 영화가 나오려면 좋은 시나리오가 많아야 하고 그러려면 전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저 역시 시나리오를 직접 써서 감독 데뷔를 했지만 좋은 드라마가 나오려면 시나리오 작업을 연출 준비과정 정도로 생각하는 지금의 관행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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