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기영화가 논픽션인 건 아니다. 여러분이 사료들을 모으고 증인들을 인터뷰해서 존 F. 케네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면 그건 논픽션이 될 수 있다. 그게 꼭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논픽션이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하여간 어떤 전기영화가 논픽션이 되려면 필수적으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기영화’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일단 화면에 뜬 사람이 아무리 자신이 리처드 닉슨, 알렉산더, 프랑수아 미테랑, 엘리자베스 1세, 하워드 휴스, 레이 찰스, 도로시 파커라고 주장해도 그들은 여전히 앤서니 홉킨스, 콜린 파렐, 미셸 부케, 케이트 블란쳇,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이미 폭스, 제니퍼 제이슨 리이다. 분장한 배우들이 대사를 암기하며 실존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영화사가 돈 들여 만든 세트이고 그들이 말하는 대사는 작가들이 상상력으로 뻥튀기해 만든 가짜들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들은 픽션이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뻔하고 자명해서 굳이 법원이 일부러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전기영화들은 실제 사건과 인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고 심지어 당사자의 검증까지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사실과 인물은 재료 이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엘리자베스 1세나 하워드 휴스와 같은 저명인사의 삶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우린 대상이 된 인물들보다는 그들을 재료삼아 영화를 만든 예술가의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하워드 휴스의 삶을 영화화할 때 그 탐색은 정말로 재미있어진다. 테일러 핵포드의 <레이>는 핵포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들었어도 크게 다른 영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휴스의 삶을 다룰 경우 나올 수 있는 영화들의 종류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여러분이 비행기와 기계들을 좋아한다면, 그를 불굴의 비행사로 보고 새로 발명된 비행기와 속도에 집착하는 용감무쌍한 영웅으로 그릴 수 있다. 여러분이 할리우드 가십과 섹스에 관심이 있다면 그를 세기의 플레이보이로 만들어 캐서린 헵번, 존 폰테인, 진 티어니, 에바 가드너와 같은 여자배우들과 휴스가 나누었던 스캔들에 집중할 수 있다. 여러분이 할리우드 동성애 세계와 루머에 관심이 있다면 휴스가 캐리 그랜트나 타이론 파워와 같은 미남 배우들과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정사에 집중하거나 그가 에이즈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검증할 수 있다. 여러분이 정치적으로 좌파라면 그를 사악한 가부장주의자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자본가로 만들어 온갖 비리를 캘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영화 예술의 검열과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매카시 시절 당시 휴스가 RKO 스튜디오 사람들 위에서 얼마나 고약한 악당처럼 행동했는지 그리면 된다. 만약 여러분이 존 말코비치와 같은 성격파 배우의 개성을 살리고 싶다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습관을 가진 초라한 노인으로 죽어갔던 말년을 다룬 비극을 그릴 수 있다.
지금까지 꽤 길게 떠들어댔는데도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미국의 경제를 뒤흔드는 거부이면서 떠돌이로 행세하며 미국을 누볐던 젊은 시절의 그의 일화는 어떤가(참, 그건 이미 그의 친구 프레스턴 스터지스가 <설리반 여행기>로 만들었다). 그의 기술 취미를 과장해 복고풍 SF의 조연으로 등장시키는 건 또 어떻고?(흠, 그러고보니 그것도 <로케티어>에서 이미 했다)
하워드 휴스, 20세기를 온몸으로 휘두른 남자
그렇다면 스코시즈의 하워드 휴스는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그가 그리려 했던 휴스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우선 스코시즈가 선택한 시대를 보자. 그는 휴스가 첫 번째 대작인 <지옥의 천사들>을 찍었던 20년대 말에서 시작해서 소문도 요란한 청문회가 끝나고 ‘헤라클레스’가 비행에 성공한 40년대 중반까지를 커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상식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시기는 하워드 휴스 경력 중 가장 화려한 때이며 보는 재미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휴스는 그 이후에도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들과 놀아났고 결혼도 했으며 온갖 스캔들과 비리에 말려들었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훨씬 스코시즈가 다룬 이야기보다 훨씬 침침하고 지저분하며 스펙터클도 결여되어 있다. 아마 배우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무리 분장을 해도 영화 후반부에선 여전히 지나치게 젊어 보이니.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분명 이 시기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거부였던 하워드 휴스에게 가장 화려한 때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의 젊음과 부가 아니라 그의 목표와 대상이다. 젊고 패기에 넘치는 거부는 어디에나 있다. 하워드 휴스가 그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그는 스코시즈의 전기영화 주인공이 될 자격을 얻었는가? 왜 스코시즈는 도널드 트럼프나 빌 게이츠 대신 하워드 휴스를 선택했는가? 여기서 20세기라는 시대와 휴스라는 개인의 연결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워드 휴스는 20세기를 20세기로 만든 두 가지 중요한 흐름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영화와 비행기다.
객관적으로 보면 영화사에서 휴스의 위치는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 그는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놀아났으며 꽤 히트한 영화들을 여러 편 제작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뤼미에르 형제나 에디슨처럼 영화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RKO사를 인수해 한동안 보스 행세를 하긴 했지만 워너 형제나 해리 콘처럼 할리우드에 대단한 족적을 남긴 스튜디오 거물도 아니었다. 영화 몇편을 감독하고 각본도 썼지만 영화 예술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비행사로 넘어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몇몇 근사한 비행 기록을 만들었고 중요한 항공사의 소유주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행기 한대를 만들긴 했지만 하워드 휴스가 없었다고 해서 미국 비행사가 특별히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휴스가 무언가를 만들고 개발했다는 게 아니라 그가 발명과 도전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 역동적 에너지를 발산했다는 데 있다. 위대한 엔지니어들과 유능한 스튜디오 보스들의 이야기에선 그들의 업적의 무게만큼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외모도 그저 그렇고 사생활도 시시하며 스캔들도 없다.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 상당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젊은 거부가 20세기라는 시대가 제공해주는 모든 장난감의 기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걸 휘두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교과서적 기술이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부여받은 채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 얻은 기술과 장난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극적인 부침을 거듭했던 20세기 전반의 서구 역사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 된다.
스튜디오 시절 할리우드를 부활시키다
<에비에이터>에서 영화는 비행기보다 조금 더 중요하다. 20세기 영화 예술의 진정한 감상자이고 예찬자인 스코시즈라는 남자가 비행기보다 영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스코시즈의 영화 속에서 비행기가 휴스의 인생을 차지하는 비율은 영화보다 조금 더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할리우드와 영화는 여전히 그림자처럼 그의 인생을 맴돈다. 그는 휴스를 그가 그처럼 동경하고 안에 들어가길 바랐던 전성기 할리우드로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개조한다.
당연히 스코시즈는 휴스에게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다. 스코시즈는 휴스를 크게 비판할 생각도 없고 그의 허물을 폭로할 생각도 없다. 진짜 휴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화의 모태가 되었던 찰스 하이햄의 휴스 전기를 읽으면 된다. 스코시즈는 하이햄이 공들여 까발린 온갖 비리들과 가십들을 대부분 지워내고 그를 열정과 비교적 정상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젊은이로 만들어놓는다. 스코시즈는 거짓말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영화에서는 이성애 로맨스밖에 그려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휴스의 양성애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와 욕망을 위해 필요한 부분만 따와 재조립하는 것뿐이다. 스코시즈가 휴스의 동성애를 다루지 않는 건 휴스와 타이론 파워의 관계보다 휴스와 캐서린 헵번의 관계가 더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하긴 누가 타이론 파워를 연기했어도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가짜 캐서린 헵번의 근사한 재현의 재미는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휴스의 우울한 말년을 그리지 않는 건 그 시절이 스코시즈가 품은 욕망의 해소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에비에이터>에서 스코시즈의 대리만족은 <백만장자들이 사는 법>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부자들의 화려한 요트와 저택에 군침을 삼키는 평범한 시청자들의 감상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그는 진짜 할리우드였던 스튜디오 시절의 할리우드를 다시 만든 뒤 그웬 스테파니, 케이트 블란쳇, 케이트 베킨세일과 같은 21세기의 스타들에게 가발을 씌우고 염색을 하고 악센트를 익히게 한 뒤 그가 젊은 날 꿈속에서 갈망했음이 분명한 할리우드 스타들인 진 할로,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로 뜯어고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가짜 하워드 휴스 옆에 두고 놀아나게 한다. 심지어 당시 컬러영화의 질감까지 흉내낸 스코시즈의 이 전기영화는 휴스와 상관없는 이유로 변태적이기까지 하다. 영화를 위해 그웬 스테파니를 진 할로로 뜯어고치는 스코시즈와 여자친구를 죽은 짝사랑 상대와 닮게 뜯어고치는 <현기증>의 스카티가 특별히 다를 이윤 또 뭔가?
<에비에이터>는 기본적으로 장엄하지만 얄팍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20세기라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대신 영화는 자신의 욕망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소할 수 있었던 젊은 거부인 하워드 휴스를 통해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욕망과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데 더 집중한다. 얄팍하다고? 물론 얄팍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영화의 얄팍함을 물고 늘어질 필요가 있을까? <에비에이터>를 흥미로운 예술적 성찬으로 만드는 건 바로 그 단순하고 정직한 욕망 자체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