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다중인격·후최면…감흥없는 ‘흥행안전판’
2005-03-11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숨바꼭질>

우리 신문사 4층에 사무실이 있는 한 영화주간지의 남아무개 편집장이 갑자기 죽었다. 그 일주일 뒤 내가 원고청탁을 자주 했던 영화평론가 정아무개가, 또 일주일 뒤엔 영화제 프로그래머 허아무개가 차례로 시체로 발견됐다. 아이고, 내 주변에서 이게 무슨 변고야 하면서 컴퓨터를 열다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만다. 내 컴퓨터에 담긴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이 숨진 이들의 이름과 숨진 순서까지 똑같지 않은가! (참, 남 편집장과 정 평론가 사이에 문화부 이아무개 부장도 죽었다.) 내가 범인이 아닌 건 내가 안다. 나 말고 내 전화번호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그가 범인일 터. 아! 나와 함께 영화를 담당하는 후배 김아무개 기자에게 내가 메일로 전화번호부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쓴답시고 여기까지 썼다. 나보다 글 잘 쓰거나 나를 괴롭히는 놈들을 죽게 해서 속은 후련한데 범인은 누구로 한다지? 김아무개 기자를 연쇄살인자로 만들어? 신혼의 단물이 아직 덜 빠진 그 초보 아줌마에게 살인 동기를 어떻게 부여하지? 맞다, 후최면! 김아무개는 후최면에 걸려 누군가에게 “너 얼굴 크다, 아무개보다 얼굴 크다”는 말만 들으면 꼭지가 돌아 그날 밤으로 살인을 하는 거다. 그럼 누가 후최면을 걸지? 그래, 내가 걸면 되지. 내가 다중인격자이면 된다. 낮엔 멀쩡하다가 해질녘에 잠깐 또라이가 돼 김아무개에게 이렇게 속삭이는거다. “대충 까짓거 죽이면 되잖아.”

여하튼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다 치자. 돌 맞지 않을까? 내가 관객이라면 돌을 던지겠다. 나는 연쇄살인물 류의 스릴러 영화에서 ‘다중인격’ 또는 ‘후최면’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 버릇처럼 눈살을 찌푸린다. 이 두 가지는 만병통치약이어서 어떤 모순된 설정에도 끌어다 쓸 수 있지만, 그때문에 영화와 관객 사이의 공정한 추리 게임을 방해한다. 영화 속의 다중인격자나 후최면에 걸린 이는 평소에 멀쩡하다가 갑자기 살인마가 되고, 그 직후 다시 멀쩡해지고, 그걸 그 자신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합리적인 추리 대상이 될까? 물론 더 정교하게 플롯을 짜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지금까지 이 두 변수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십중팔구는 나중에 영화가 일방적으로 “얘가 범인이었어”라고 선언하고, 관객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는 경우였다.

후최면을 핵심 변수로 사용한 한국영화 가 그랬고, <올드보이>에서도 일부분이지만 후최면이 등장하는 부분은 깔끔하지 못하게 다가왔다. 지난 4일 개봉한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숨바꼭질>에도 다중인격이 주요 변수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추리 게임의 공정함을 보장하지 않으며, 중심 캐릭터의 묘사가 소홀해 나중에 다중인격자로 밝혀진 뒤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식스 센스>의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으로 밝혀진 뒤에 밀려드는 처연함을 이 영화에선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흥행이 좋다. 내가 편협한 걸까? 그렇다면 앞에 쓰다만 시놉시스를 밀고 가봐? (‘○아무개’가 자신이라고 생각하실 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하여 양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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