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늘 가슴속에서만 불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재에 대한 자괴감으로 늘 불면증에 시달리던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무책임하게 ‘운동’을 정리하고 군에 다녀온 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는 나를 골방으로만 몰아갔다. 불면증에 시달려 벌건 눈으로 전전하던 나에게 칙칙한 냄새로 기억되던 좁은 공간, 비디오방은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일상처럼 비디오 몇 개를 고르고 가수면 상태에서 몽상을 즐기려하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에 창끝을 들이대었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 영화에 대한 처음 느낌은 당혹이었다.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고통을, 절망을, 비루함을 표현하는 언어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구나. 이제 영화의 줄거리는 기억에서 퇴색되었지만 몇 장면들은 생생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막막하던 나의 현실에 닿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침울함과 막막함은 늘 나를 짓눌러 쾨쾨한 습기로 기억되는 도피의 지하공간으로 불러들였으니, 영화가 주는 모든 상황을 나의 처지에 맞추어 해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쥘리에트 비노슈. 그녀의 이미지는 무슨 색이었을까? 사실 그녀의 연기보다는 그녀의 표정이 주는 느낌이 더 선명했던 것 같다. 해탈한 노승이 던지는 선문답 같은 눈빛이었다면 표현이 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지의 철없는 표정이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듯한 현인의 웅변보다 커다란 느낌으로 각인되었다. 누추한 일상에 숨어 있는 현란한 삶의 색들을 스스로 건져내는 눈빛이었다.
그런 봄날이 몇번지나가고 일상의 부역에서 회상한다
처음으로 같은 영화를 서너번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녀의 이미지는 어쩌면 내가 꿈꾸던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아있음.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는 동안 내가 숨쉬는 것들에서 자극을 발견하고 날것 그대로 내 욕망에 충실하고 바람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릴 수 있는 철없는 용기. 지금도 선명한 그 눈빛은 그녀의 답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날것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겁 많은 아이의 습한 눈빛이 왜 내 가슴을 그토록 헐떡이게 했을까?
그 후, 봄이 몇 번 더 날 괴롭히는 동안, 난 직업을 얻기도 했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기도 하여 고루한 일상에 부역을 하며 지내고 있다. 허나 지금도 가끔 권태에 숨 막혀 불면증이 도질 때면 그 시절의 쥘리에트가 날 부른다.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날것 그대로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타자에 대한 해석은 주체의 상황에 기대어 있다고 믿는다. 지금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다시 봄이다. 처절하게 생을 믿은 것들이 다시 비루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공간이다. 그 시절의 암담함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표정을 달리하고 있다. 매일 부딪치는 현실은 미래를 알 수 없게 치장하고 나는 또 나만의 지하로 나를 가둘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인들 평온한 광장만 허락되겠는가? 다시 그녀의 알 수 없는 눈빛이 그리울 듯하다. 허나 지금은 뒷산에 올라가 휘파람 한번 불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