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화 <69>의 이상일 감독
2005-03-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오계옥
“지금은 축제를 열 순 있어도 혁명을 하긴 힘든 시대다”

이상일(32)은 조총련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을 다니던 중, ‘무작정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뛰어든 재일한국인 영화감독’이다. 그에게도 “언젠가 정체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단편영화 <청>(2000)과 장편 데뷔작 <보더 라인>(2003) 이후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 <69>(2004)의 주인공들을 보면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닌 것 같다. <69>는 ‘무작정 축제를 열겠다고 마음먹은 1969년 남자 고등학생들’의 무용담이다. 감독의 말을 듣다보면 그해 나온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와 선댄스식 막무가내 모험에도 겹친다. 영화 개봉에 맞춰 한국에 온 이상일 감독은 “지금 우리가 보고 싶은 69년을 그리고 싶었다”고 들려준다.

-영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일본의 시네콰논 영화사 이봉우 대표를 찾아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한 걸로 알고 있다. 용감하다.

=용감이라…. (웃음) 용감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름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영화를 해야 할지 몰라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봉우 대표를 찾아갔던 것이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가 성공하면서 재일동포 프로듀서 이봉우씨가 많이 알려졌고, 아무래도 다른 일본 사람을 찾는 것보다는 심적으로 더 편하게 느껴졌다.

-첫 장편을 만들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나.

=당시 경제학과에 다니는 일반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영화현장에 일단 들어갔고,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청>은 부산에서도 상영했었고, 피아영화제에서도 수상했다. 그러고나서 장편 데뷔작 <보더 라인>을 만들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당신의 영화감독 이력에 미치는 장점이나 단점이 있나.

=단점은 없고, 장점이 많다. 우선 사람들이 이름을 빨리 기억한다.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 드문 존재이기 때문에 같은 세대의 일본 사람들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면들도 있다. 그런 게 장점인 것 같다.

-특수한 정체성 때문에 당신의 영화가 곡해되는 지점은 혹시 없나.

=한국에서는 확실히 재일 한국인을 보는 시각이 특별하다. 그래서 그런 말들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정체성을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그때는 그런 질문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69>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보더 라인>은 마이너 제작 시스템 안에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69>는 메이저 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차이가 있나

=무엇보다 스탭과 차량이 훨씬 많아진다는 거다. 현장에서 “저기 있는 사람들 방해되니까 좀 비켜달라고 해. 저 차들 좀 어떻게 할 수 없어?”라고 소리치고 보니 모두 우리 스탭들이었고, 우리 차량들이었다. 나도 메이저와 마이너의 작업이 어떻게 다를지 생각하면서 작업을 해왔지만, 다른 건 크게 없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개봉 이후에 반응이라고나 할까. 마이너 영화를 만들면 아무도 모르지만, 메이저 영화를 만들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반응을 보인다.

-<69>는 지난해 7월에 일본에서 개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에서의 관객 반응은.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시점에 후속작을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번 한국에서처럼 프로모션 시사회에 가보면 대다수 젊은 여성들이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 것 같다.

-그때 촬영하던 작품, 즉 후속작은 어떤 영화인가.

=<스크랩 헤븐>이라는 제목이고, 오다기리 조가 출연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모색하는 영화이다. 처음으로 내 동년배를 주인공으로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사회에 대한 불만, 분노 등을 표출하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화다. 거의 완성된 상태고, 후반작업도 끝났다. 엔딩곡으로 쓰일 곡만 넣으면 된다. 돌아가면 바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개봉 중에 다른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닐 텐데.

=<스크랩 헤븐>도 올 10월에 공개할 예정이고,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때쯤에 또 다른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처럼 2년에 한편, 3년에 한편 영화를 만들어서는 우선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다. (갑자기 또렷하게 한국말로) 제가 딸이 있어요. 딸이. (웃음) 일본은 감독 개런티가 낮다. 또 다른 이유는, 나같은 경우 작품을 연이어서 만들지 않으면 곧 잊혀진다. 한편을 만들면, 빨리 다음 작품을 만들고 싶어지는 일중독자이기도 하고.

-<69>를 보면 영화를 즐겨 보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다른 영화들을 보며 착상을 얻기도 하는가.

=그런 편이다. 한편의 영화를 기획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으면 거기에 관련된 이미지, 영화, 소설 등 여러 가지 것들을 찾아보는 편이다. <69>의 주인공들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맡았던 부치와 선댄스 역과 비슷하다. 그 밖에도 이 영화가 6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당시의 공기를 느끼기 위해서 그때 나온 영화들을 많이 봤다.

-<69>는 프로듀서가 먼저 제안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이지치 게이라는 프로듀서가 있다. 돌아가신 소마이 신지 감독하고도 많은 작업을 했고, 무라카미 류의 영화 데뷔작도 프로듀싱했다. 그는 무라카미 류의 원작 <69>를 꼭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경험있는 감독들을 포함하여 많은 감독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각본을 구도 간쿠로(영화 <고>의 각본가)에게 맡기기로 정하고 나서, 이 사람과 제일 어울리는 감독이 누구인가를 고려하던 중 나이 많은 감독보다는 젊은 감독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고, 내 첫 번째 장편 <보더 라인>을 보고 제안을 해온 것이다.

-당신은 원작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

=나는 1969년이라는 시기, 그 시대를 재현하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시대성보다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 자신이 뭔가 하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을 휩쓸고 이끌어나가는 그런 주인공의 캐릭터에 매력을 많이 느꼈다. 확실한 동기 없이도 뭔가 일을 벌이는 주인공들이 흥미있었다. 나도 영화에서처럼 고등학교 시절에 바리케이드 봉쇄 한번 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무라카미 류의 원작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며 추억에 잠겨 쓴 것이라면, 구도 간쿠로가 쓴 각본은 그런 향수에 젖은 것이 아니다. 영화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이런 녀석들, 무리들이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 있다. 각본 작업을 할 때부터 이미 그 시대를 재현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자고 합의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싶은 69년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첫신과 마지막 신은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다. 원작에서는 <스탠 바이 미>처럼 향수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끝나는데, 영화 같은 경우는 그 이야기가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똥에도 사상이 있을까”라는 전공투 세대를 조롱하는 대사도 나온다. 축제가 투쟁보다는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 대사는 조롱이 맞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래도 축제를 열 수 있어도 혁명을 하기는 힘든 시대다.

-쓰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마사노부가 영화의 두 주인공으로 어울린다고 판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쓰마부키가 ‘부치’, 안도가 ‘선댄스’라고 생각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포함해서 쓰마부키 사토시는 <69> 이전까지 순진한 성격의 인물로 주로 나왔고, 남동생으로 삼고 싶은 배우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 점에서 좀 탈피해 활력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안도 마사노부에게서는 코미디를 보고 싶었다. 굉장히 성실한 학생처럼 행동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바보처럼 보여 웃기는 그런 연기를 시키고 싶었다.

-평상시 당신의 관심을 끄는 소재들은 어떤 것들인가.

=어떻게 하더라도 마이너리티를 자주 다루게 되는 것 같다. 나열에서 일탈하여 삐죽 솟아나와 있는 인물들에 관심을 쏟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 관객이 어떤 점들을 눈여겨봤으면 좋겠나.

=즐겼으면 한다. 즐긴다는 것 자체가 능동적인 거다.

-그럼, 당신은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뭐가 제일 재미있었나.

=촬영 끝내고 회식하면서 불고기 구워 먹는 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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