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꺾이지 않은 검열의 힘
2005-03-18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아득히 먼 표현의 자유
<피와 뼈>

지난 달 25일 개봉한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는 중간 부분의 1분50초 가량을 삭제한 채로 상영됐다. 일제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초반에서 일본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먹고살기 급급했던 재일교포 가운데 의식있는 청년으로, 주인공 김준평의 딸이 짝사랑하기도 했던 찬명이 출소 뒤 북한으로 떠나는 장면이었다. 찬명은 김준평의 아들 마사오에게 훗날 자신을 따라올 것을 권하면서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인공기로 뒤덮인 역을 빠져나간다. 이 장면이 잘려 나감으로써 영화 초반부에 비교적 주요인물로 등장했던 찬명의 행방은 갑자기 묘연해진다.

영화에 가위질을 한 것은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아니라 수입사인 스폰지였으니 사전검열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이 영화를 수입추천심의에 넣은 뒤 수입추천소위의 한 위원으로부터 “인공기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북한 노래와 만세까지 부르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수입추천제는 지난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이 절대적으로 금지한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는 위헌판결을 받았음에도 아직 폐지되지 않은 심의제도의 일부이다. 외국의 독립영화나 작가영화들을 수입해오면서 수입추천과 등급심의를 거치는 동안 개봉이 늦어지는 걸 지켜봐온 수입사는 최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장면을 자진삭제했다. 이 사연은 국가기관이 직접 가위를 든 모양새는 아니지만 여전히 검열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스폰지는 지난 14일 삭제된 부분을 복원해 영상물등급위의 비디오·디브이디 등급심의 신청을 제출했다. 사정이야 어떻게 됐든 삭제된 부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디브이디는 제대로 복원해서 출시하겠다는 게 스폰지의 입장이다. 삭제 문제에 대해 스폰지의 견해를 받아들였던 최양일 감독은 몹시 서운해 했고, 기회가 되면 검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한국 영화관계자들과 관객들에게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재일동포 2세인 최양일 감독은 일본사회에서 영화를 만들며 검열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지난해 일본감독협회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내놨던 입장이 “표현의 자유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피와 뼈>의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던 최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법원의 일부삭제개봉 판결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한국이나 일본이나 참으로 어려운 시대”라는 말을 했었다. 다음주 초에 결정된 심의에서 문제가 된 부분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이에 대해 최 감독이 드러낼 견해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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