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에 숨겨두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거기에 머물면서 기다린다, 언젠가 어떤 우연한 말이 갑자기 그들을 불러내기를, 그리하여 대단히 다양한 환경 중 하나에 직면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마틴 스코시즈의 <에비에이터>와 마크 포스터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제임스 조이스가 꿈꾸었을 법한 동화이다. 한때 잠깐 유행했던 ‘동화들의 원본’ 시리즈 혹은 ‘성인 동화’라는 이름하에 출간되었던 그 잔혹한 이야기들을 기억하는지? 책방에 서서 그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몇번이나 치솟아오르는 혐오감에 얼굴을 찡그렸던 기억. 동화와 어른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끔찍한 삶이 동화라는 이상한 형식에 끼워 맞춰질 때의 그 잔인한 불일치는 힘겹다. 동화가 본래 아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삶의 정도를 알려주기 위해 씌어지는 종류의 글이라고 한다면, 동화의 본질에 반하는 삶의 이면에 대한 구구절절한 부연설명이 붙을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첨가되는 순간 동화는 악몽이 된다. 혹은 대부분의 동화 속 주인공들은 그저 시간의 직선적인 배열을 따라가며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베르그송은 미래가 현재로부터 차단되면 운동이 뒤죽박죽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운동은 자족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비에이터>와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주인공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도중 자꾸 침입하는 두려운 과거를 뒤돌아보다 결국 그것에 박제된다. 그러니까 두 영화는 (잔혹 성인) 동화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동화-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이카루스의 초상
어머니는 어린 하워드 휴스를 목욕시키면서 “넌 안전하지 않단다, 얘야. 흑인들이 사는 집에 붙여진 발진티푸스 표식을 보았니?”라고 묻는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기묘하다. 마치 아이의 현재를 근심한다기보다 자신의 현재를 아이의 미래에 투사하는 듯, 거의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이상한 경고, 수많은 세균들이 침입하기 쉬운 연약한 육체, 그 공포를 아는 순간부터 그의 육체와 영혼은 공포와 근심으로 실제로 연약해진다. 하지만 세계와 투쟁하기에는 바깥 세계를 너무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혹독하게 괴롭힐 수밖에 없다.
어린 휴스는 결심한다. 자라나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벌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최고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그는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규칙을 깨부수며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어머니의 경고에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안전해지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 모순된 시도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만약에 하워드 휴스가 현대에 존재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공공’의 장소가 20세기 초엽보다 확대된 현대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지키기에 필사적이었던 휴스가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이미 넘어버릴 터. 휴스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특수제작된 비누가 놓인 깨끗한 물통, 뜨겁지만 세균이 없는 사막, 기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높은 항공, 그리고 자신의 집이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이름이, 혹은 영화의 이름까지 다른 무엇도 아닌 ‘비행사’인 것은 얼마나 적절한가.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이 어른-소년은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자신의 안전을 근심해주고 자신만을 지켜줄 엄마의 위대한 역할. 휴스가 캐서린 헵번과 처음 섹스할 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장면은 곧장 그가 매끄러운 비행기의 표면을 쓰다듬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비행기 안에서, 기류조차 없는 그 진공과도 같은 대기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휴스는 여성들에게도 자신을 보호해줄 어떤 느낌을 갈구한다. 휴스는 헵번의 가족과의 시끌벅적한 식사 뒤에 헵번에게 분노를 터뜨리고(“내가 아는 케이티가 아닌 것 같아”), 자신과 결혼하기를 거부하는 에바 가드너의 침실(프로이트식의 가족 소설에 따르면, 엄마는 다른 이와 섹스하면 안 된다!)에 도청기를 설치한다.
게다가 영화 속 하워드 휴스의 귀는 썩 좋지 않다. 그는 뭔가 자신에게 불리한, 혹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뭐라고 했죠?”라고 되묻는다. 함께 골프를 치던 헵번이 그의 정치적 성향을 질문할 때, 혹은 캐서린 헵번의 가족과 식사를 하던 시끄러운 순간에 그는 번번이 대화들의 방향을 놓친다. 그건 그가 정말 못 들었다기보다 마치 아이들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의 제임스 배리가 ‘~척하기’의 미덕을 낙관적으로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을 취하면서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상대방의 얼굴에 귀를 들이대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집중하려 애쓰는 휴스의 표정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내팽개쳐진 소년의 곤혹스러운 그것이다.
원한다면 그 순간에 영원히 멈출 텐데…
제임스 배리 역시 휴스처럼 어린 시절의 한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형이 사고로 죽은 이후, 실의에 잠긴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애쓰다가 마침내 죽은 형의 옷을 입고 마치 그인 척하는 행위를 통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길’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그때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어린 시절의 배리는 소년-어른이었고, 성인이 된 배리는 어른-소년이 된다.
아름다운 미망인 실비아와 그녀의 네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배리는 영원히 늙기를 거부하는 소년 피터 팬과 자신의 아픈 과거를 겹쳐놓으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앨리스를 창조한 루이스 캐럴과도 비견할 만한 이야기다. “만약 내가 너라면 일곱살에 멈출 텐데”라고 앨리스에게 심술궂게 충고하는 험프티 덤프티라든가, 앨리스가 무사히 숲을 빠져나갈 수 있게끔 보호해주는 애정어린 하얀 기사라든가, 제임스 배리는 그 양쪽의 심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는 어른이 되고자 하는 웬디를 이해하지 못하는 피터 팬이자, 아이들이 자신의 보호를 거부하고 달아나버린 것을 알고 구슬프게 우는 유모 나나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배리는 현실적 측면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자신의 꿈의 세계를 지켜내고자 한다. 외로운 아내의 침실 안쪽은 그저 컴컴하지만, 배리의 침실 안쪽은 푸른 언덕과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마치 마그리트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배리의 천진난만한 어린애다움과 더불어 마그리트의 그림이 내포하는 그 비현실적 측면을, 이를테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리의 안간힘을 동시에 보여준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대부분 작가들의 전기영화가 그러하듯이 글쓰기 기법을 ‘보이스 오버’로 간편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대신 마크 포스터는 글쓰기를 영화 만들기(환상을 재현시키기)의 일부분으로 포함시켜버린다. 꿈과 현실이 전혀 구분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아이처럼, 배리가 데이비스가의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할 때 그가 어떤 문장을 말하면 장면은 그대로 되어버린다(구약성서의 첫 장면을 연상시키는!). 곰이 되기를 꿈꾸는 애완견은 실제로 서커스장에서 슬픈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노래하는 곰이 되고, 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깐깐한 할머니의 손에서는 순식간에 갈고리가 튀어나온다. 제임스 배리는 믿으면 실현된다는 것을 정말로 믿었다. 혹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대신 작품 속에서라도 이루어내고야 만다. 실비아가 네버랜드 속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의 곤혹스러울 정도의 낙관주의가 안간힘을 다해 빚어내는 갈구의 또 다른 측면이다.
아내와의 이혼, 이웃들의 수군거림(아주 미약하게 처리되고 있지만, 제임스 배리의 소아성애 성향을 지적하는 소문이 등장한다), 관객의 혹평, 사랑하는 실비아의 죽음…. 현실에서의 배리는 삶의 슬픔을 알고 있지만, 현실을 누구도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로 치환시켜버리면서 상상 속의 봉합을 실현한다. 루이스 캐럴이 사랑과 욕망, 슬픔이 뒤섞인 어른의 시선으로 앨리스를 바라보면서도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어했던 그 노력으로, 앨리스를 단지 ‘리델 학장의 어린 딸, 엘리스 리델’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아닌 영원의 소녀상으로 고정시킨 바로 그 기법을 통해, 배리의 소년성 역시 피터 팬이라는 소년을 통해 영원히 보존된다. 엄마가 왜 죽어야 하냐고 묻는 어린 피터에게 배리는 대꾸한다. “나도 모르겠다, 얘야. 하지만 내가 그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가장 행복했던 모습으로 기억할 거야.” 현재는 그의 삶 속에서 자꾸만 미끄러지지만, 과거는 영원히 보존된다. “최근 사건 이후에 더 오래된 사건, 의지적인 사건 이후에 비의지적인 사건이 사라진다.” 19세기 말 프랑스 정신과 의사 테오뒬 리보는 망각의 법칙을 그렇게 결론지었다. 소년은 그렇게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