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에선 여러 ‘어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우선 ‘아들의 어머니’가 나오는 <말아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네버랜드를 찾아서> <에비에이터> <레이> <스파이더> 등에서 어머니와 아들간의 ‘지극한 애착과 지난한 도착’을 감상할 수 있다. 그녀들의 존재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아들의 삶과 내면의 한가운데를 점한다. 그들의 긴밀한 모자관계는 <말아톤>에 의해 성찰되기도 하고,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 의해 섬뜩하게 재현되기도 하지만, <네버랜드를 찾아서> <에비에이터>에서는 숭고하게 회상된다. <레이>는 숭고한 모성을 아내에게 승계하고 애첩과 놀아나지만, 이러한 ‘어머니-창녀’ 이분법의 얄팍함은 <스파이더>에서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한편 ‘딸들의 어머니’는 다르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와 <엄마…>(류미례 감독)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의해 재현되는 ‘딸들의 어머니’는 ‘모성적 존재’들이 아니다. ‘어머니’라는 역할에 충실하기보다는 ‘나도 사랑받고 싶다’고 외치거나, 자기 살 궁리부터 한다. 과연 ‘아들의 어머니’와 ‘딸들의 어머니’는 다른 것인가? 언급한 영화들의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 질문에 답해보자.
<말아톤>과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반성과 모성
<말아톤>과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는 아들의 삶을 대신 살다시피하는 대단한 어머니들이 나온다. 아니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대신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두 영화는 모두 지독하게 밀착된 모자관계를 그리고 있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다. <말아톤>의 그녀는 전통적인 ‘자애로운 어머니’에 가깝고, <맨츄리안…>의 그녀는 할리우드의 새로운 전통이 되어버린 ‘오이디푸스적 어머니’에 가깝다. 또한 <말아톤>의 어머니가 모성을 반성함으로써 ‘긍정->부정->긍정’의 과정을 밟는 반면, <맨츄리안…>의 어머니는 결코 반성하지 않음으로써, 시종 부정적인 어머니로 파멸한다.
<말아톤>의 그녀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운동까지 참 악착같이 반복하여 가르친다. 그녀는 삶을 온통 아들에게 쏟아붓고 있으며, 외부와 단절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그나마 소통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다. 영화의 이런 설정은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특권적 관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말아톤>이 여느 ‘장애-극복’ 영화들의 도식과 다른 것은 ‘절대화된 모성’을 의심해가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엄마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녀는 중반 이후 “애 속을 알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토로한다. 코치는 “초원이가 당신 없이 못사는 게 아니라, 당신이 초원이 없이는 하루도 못살 것”이라 몰아붙이고, 둘째아들은 “나는 반항이라도 하지. 쟨 뭐야?”라고 이죽거린다. 마침내 영화는 그녀에게 아들의 손을 의도적으로 놓았던 기억을 들춰낸다. 그녀는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했다며 몹시 자책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어떤 모성도 절대적이거나 완벽하지 않으며, 헌신적인 모성애의 내부에 끔찍한 권력이 숨어 있음을 드러낸다. <말아톤>은 모성신화를 반복하는 대신, 모성신화를 의심함으로써 모성애를 성찰한 값진 영화이다.
<맨츄리안…>의 그녀는 강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친정의 정치적 명맥을 계승하고, 남편과 아들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의 충실한 딸’이자, 남근의 대리물인 아들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어머니이다.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라 있고, ‘아들의 어머니’로 자신의 권력적 지평을 사고하는 그녀는, 남성중심사회의 ‘유사남성’이자 ‘어머니’는 될 수 있을지언정, ‘여성’은 아니다. ‘어머니’와 ‘여성’은 포함관계가 아니라 모순관계이다. 아들에 의해 욕망이 충족되는 ‘어머니’는 아들(남성)의 입장을 대리하며, 여성의 입장에 맞서기 때문이다.
<레이>와 <스파이더> 속 어머니-창녀 이분법
<네버랜드를 찾아서> <에비에이터>의 아들들은 어머니를 회상한다. 기억이 애틋할수록 그들은 유년에 고착된다. 어머니 신화는 주술이 되어, 그들을 소년으로 묶어둔다. 그들은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한다(<에비에이터>의 여자들도 어머니에 다름 아니었다). <레이>도 어머니를 회상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사랑한다. 어떻게? 책임감 있고 아량있는 아내를 어머니의 대리물로 삼아 집에 모셔두고, 섹시하고 변덕스러운 애첩과 섹스하면서, ‘어머니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는 여성 코러스를 자신의 음악 선택권을 이용하여 맘껏 취하고 바꿔치기한다. 그녀들은 작곡이나 음반제작 등 산업의 재생산 고리를 점하지 못한 채, 소모품처럼 쓰다버려진다. 성공을 원하는 그녀들은 ‘남근적’ 존재인 그의 낙점을 받고자 싸움도 불사한다. 카메라는 이러한 역관계는 무시하고, 그녀들의 질투행각과 남자를 통해 사회적 성공을 거두려는 욕망을 희화화한다.
<스파이더>는 <레이>가 구사하는 이른바 ‘어머니-창녀’ 이분법이 얼마나 치졸한 환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어린 시절의 외상을 ‘순박한 어머니와 천박한 창녀’의 선악이분법으로 그리다가, 전형성에 지루함을 느낄 즈음 확 뒤집는다. 그는 어머니를 애도하며 창녀를 죽이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소년은 아버지와 키스하는 어머니, 새로 산 속옷을 아버지가 좋아하실지 궁금해하는 어머니의 섹슈얼리티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천박한 창녀에게 어머니의 섹슈얼리티를 분리해 얹고, 창녀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와 산다고 생각하였다. 창녀와 어머니는 엄연히 다르다고 믿고 싶지만, 결국은 한몸이었고, 어린아이의 망상 속에서만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성’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딸들의 어머니’
<독일, 창백한 어머니>, <엄마…>는 여성감독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여 만든 영화이다. 파시스트 아버지로 인해 지친 독일의 어머니는 딸 얼굴에 수프를 끼얹고, “난 사랑을 원해요”라고 절규하다 딸이 말려도 자살을 시도한다. <엄마…>의 어머니는 애초에 모성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다. “냉정하고”, “독살스럽고”, 무심하며, 딸을 차별하였고, 폭음을 일삼고 악을 쓰다가 비로소 남자를 만나 “웃게” 되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어머니 역시 딸의 인생은 안중에 없고, 딸의 돈에만 관심이 있다. 그녀들은 딸들에게 모성을 발휘하지 않는다.
‘아들의 어머니’와 ‘딸들의 어머니’는 영화 속뿐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도 많이 다르다. 여아 낙태를 비롯한 남아선호사상은 물론, ‘모자보건법’, ‘모자복지법’ 등의 용어와 (‘마리아와 예수’를 비롯한) 무수한 모자상(母子像)들이 예시하듯, ‘어머니’의 대립항은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아들에 의한, 아들의’ 존재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애의 발현 대상이 (딸이 아닌) 아들, 즉 남성이라는 사실은, ‘모성’이 ‘어미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닌, 성정치학적 문제임을 말해준다. ‘모성’은 덮어써서는 안 되는 ‘가부장제의 덤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