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달콤한 인생' 김지운 '주먹이 운다' 류승완 ‘띄워주기 대담’
2005-04-01
사진 : 윤운식 (한겨레 기자)
정리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김지운 감독(왼쪽)과 류승완 감독(오른쪽)

“끝없는 연출실험 류 감독이 느껴지더군”
“김 감독 손 거치면 폼도 미학이 되더라”

“스탭 한명이 몰래 <주먹이 운다> 필름 중간 부분의 한권을 훔칠까 말하니까 누가 그럼 더 재미있어질 거라고 하지 말자더군”(김지운) “우리는 <달콤한 인생> 필름에 ‘쉬’할 생각도 했어요. 그럼 색 변해서 때깔 더 좋아질 수 있으니까 안 하기로 했지”(류승완). 4월1일 나란히 개봉하는 두 영화의 감독이 만났다. 한국 장르영화를 대표하는 두 감독의 작품이 그것도 극장 비수기에 경쟁한다는 건 분명 부담이 큰 모험이다. 그러나 부담이나 경쟁심만 느끼기에 둘은 평소에도 서로의 영화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절친한 사이다. 두사람은 혹시나 상대방에게서 훈수 받은 장면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면 어떡하냐는 엉뚱한 근심도 했다.

“감독보고 영화선택, 기분 좋아요”

류승완: 2000년에 <플란더스의 개>와 <반칙왕>이 같은 날 개봉했다던데, 봉준호 감독이 <반칙왕> 보면서 가슴이 시커멓게 탔다고 하더라, 너무 재미있어서. 나도 <달콤한 인생>보고 충격받아서 바로 집에 갔다(웃음).

김지운: 지난해 <주먹이 운다>의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류 감독의 대표작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는 방향이나 목표가 뚜렷하면서도 대중성도 높을 것 같았다. 잠깐 들은 이야기인데 필이 왔다고 할까.

: <달콤한 인생>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어떻게 그려질 지 잘 모르겠더라. <장화, 홍련>도 시나리오 볼 때는 이게 뭐야 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는 놀랐으니까. 박찬욱 감독이 말하길 <장화, 홍련> 보러갈 때 김지운 감독이 별 거 아니라고 서우(딸) 데려와도 된다고 했는데 데려갔더라면 애 비뚤어질 뻔했다고 하더라(웃음). 이번에도 영화보고 많이 놀랐다. 이렇게 풀리는 구나. 역시 아무도 믿으면 안된다니까(웃음).

: <주먹이 운다> 촬영 현장에 놀러 갔다가 허탕친 적이 있다. 저녁까지 일정이라고 해서 갔는데 워낙 빨리 찍어서 이미 끝났던 거다. 텅 빈 세트장을 서성거리면서 얘는 왜 이래, 뭐 하는 거야, 막 찍네(웃음) 했는데 영화는 잘 나오니까 대단한 거지.

: <달콤한 인생> 촬영장에 갔을 때 세트는 부서져 있고 사람들도 피폐해져 있는데 감독은 찍을 생각 안하고 고민만 하더라. 선글라스에 막 김이 껴있고. 속으로 뭐해, 이 시간에 나는 찍겠다 이런 생각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좀 더 생각하고 찍을 걸, 후회도 되더라. 영화보니까 힘들게 찍은 이유를 알겠더라.

류승완
서울이라는 공간 색다른 해석
배우능력 끌어내기 남달라…
너무 딱딱 떨어져 지치더라

: <달콤한 인생>은 폼도 끝까지 가면 미학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장 피에르 멜빌 영화에 주인공 혼자서 걸어다니는 장면이 많은데 그냥 폼이잖아. 잘못하면 똥폼되는데 <달콤한 인생>에서는 멋있고 자기철학이 있다. 나는 그런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만들 때는 절대 소화할 수 없는 감성이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내가 입으면 작업복처럼 보이는 거지.(웃음)

: <주먹이 운다>는 두 버전의 <허리케인 조>처럼 만화적으로 갈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면서 류 감독이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놀라움을 느꼈다. 연출력에 대한 자기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에서 류 감독이 자꾸 느껴졌다. 전과 달리 극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전체를 조금씩 만져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 새로웠던 게 서울이라는 공간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 느낌이었다. 남산이나 광화문은 영화에 숱하게 나오는 공간인데 여기서는 전혀 다른 동네처럼 보이지 않나. 장르영화할 때 어떤 세계를 가상공간으로 설정하느냐, 현실과 가상의 벽을 허무느냐 고민하게 되는데 그 부분의 계산이 치밀했던 거 같다. 이를테면 러시아인이나 동남아 노동자 같은 이방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주인공이 총기상인과 대면하는 장면은 매우 이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다른 영화 단순비교 예의 아니죠”

: <주먹이 운다>는 기교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의 연출 테크닉이 발휘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최민식이라는 큰 배우와 류승범이라는 막 커가는 배우의 균형을 맞추면서 이야기의 진정성을 가져가는 건 치밀한 계산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엔딩의 권투 장면은 우리 영화의 어떤 권투 장면보다 기념비적인 연출이었다. 그 장면도 거리감을 두면서 관객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인생에 손을 들어주겠느냐고 물으며 전체를 조정하고 있다.

: 마지막 권투장면을 찍으면서 한국 배우들이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파치노랑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였다면 그렇게 무모하게 고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역도산>의 설경구, <반칙왕>의 송강호가 다 그랬다.

: 주변 인물들도 심장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특히 나문희 선생은 압도하더군. 미세한 동작, 표정, 말투 하나가 사람을 흔들리게 한다. 위대한 배우가 왜 위대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 김지운이라는 연출가의 진짜 힘은 편집능력이다. 자기영화에 진짜 냉정해진다.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 장면 찍을 때 얼마 썼다는 것도 떠오르고(웃음). 또 하나 탁월한 점이 연기자의 이면을 보는 눈이다. 황정민이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진 배우가 아닌데 여태껏 그에게서 못봤던 이미지를 보여주고 다시 해체한다. 김뢰하도 <살인의 추억> 때와는 다른 터프함이 있다. 김영철 역시 숨만 식식 쉬고 있는 데 거기서 오는 압도감이 있다.

김지운
개입없이 진정성 끌고가
막 찍는거 같은데 잘 나오고…
근데 딱 5분만 덜어냈으면

: 아쉬운 점은 좀 길다는 거. 감독은 영화에 빠져있을 때 그걸 잘 모르는데, 저 황소고집으로 프로듀서와 제작자 속을 얼마나 끓게 했을까 보이더라. 초반 에피소드에서 더도 말고 5분씩만 덜어놓으면 훨씬 응집력 있었을 것 같다. 덧붙이자면 나도 비슷한 지적을 들었는데 좀 더 쿨한 느낌으로 끝났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감동이 영화 안에서 읽히기보다는 잔상이 남게. 물론 나도 필요하니까 넣었다고 대답했지만.

: 내 취향으로만 말하자면 사건 종결 뒤 선우 표정이 너무 센티멘탈했다. 그때 표정이 더 허무하거나 죽음이라는 고통 앞에 나약하게 드러난 인간을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야기가 너무 빈틈 없이 딱딱 떨어지니까 중반 이후에 지치는 느낌도 있다. 모두가 빈틈 없지만 사실 그 자체가 위태롭게 지켜온 허상이라는걸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기도 하고. 뭐 따지면 문제 많다. 영화가 너무 멋있다.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면 될 걸 왜 아이스링크에서 만나는가. 거기 문 열려면 관리인 만나야하고 절차도 까다로운데.(웃음)

: 일반 시사회에서 10대들이 신나게 보더라. 18살 등급 나올 걸 예상했으면 더 세게 찍었을 거다. 등급위에서 특정 장면이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18살이라고 했다는데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고삐리때 보면서 희열을 느꼈던 영화들의 정서로 만든 건데 고딩들을 못보게 하니까 약간 억울하기도 하다.

: 우리 땐 그래도 다 봤는데. 나도 어렸을 때 재미있게 본 영화는 모두 18살 이상이었다. 그러나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 우리는 15살 나왔으니까(웃음). 두 영화가 붙은게 초조하기도 한데 재미있는 측면도 있다.

: 어쨌든 친한 감독과 붙는 건 순수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든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선거가 연상된다. 득표율, 흑색선전 같은 게 떠오른다. 내 영화에 대한 반응을 알고 싶은데, 계속 비교만 하니까 흐트러지는 느낌도 들고.

: 두 영화가 모두 장점이 있고 보기 따라 단점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기질의 영화 두편을 막연히 어느 게 더 낫다는 비교·평가하는 건 영화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같다.

: 인터넷의 어떤 댓글에서 봤는데 우리나라도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는 시대가 왔다. 얼마나 기쁜가라는 말로 소모적 다툼을 정리하더라. 우리가 방만하게 영화를 만들어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민식, 류승범 대 이병헌(배우) 구도에서 류승완 대 김지운(감독)의 구도로 이야기한다는 게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다양해지고 고급해졌다는 변화를 느끼게 한다. 감독의 세계를 보고 그 즐거움을 기호로 영화를 선택하는 게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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