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연쇄살인자 미국을 고발하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2005-04-06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미국의 정치체제 비판하는 조너선 드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1962년 존 프랑켄하이머가 만든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미국 역사의 한장을 보여주었고 조너선 드미의 새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구스 반 산트의 장면장면을 복제한 <싸이코> 이후 가장 불필요한 리메이크로 보이지만 실제는 전혀 다른 영화이다.

군더더기 없지만 음산한 드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전작이 보여준 사악하고 아찔한 거만함이 없다. 몇몇 농담에도 불구하고 일급 정치음모인 프로그램된 최면상태의 암살자 이야기로 대통령 선거 시기에 맞춘 이 작품은 경쾌한 풍자만 담긴 것이 아니라 불길하고 잔혹한 광기까지 갖추고 있다. 풍자적이기보다 침울한 분위기는 프랑켄하이머의 원작만큼이나 앨런 파큘라가 워터게이트 이후 만든 맨츄리안식 영화 <암살단>을 떠올리게 한다. 1962년에 만들어진 원작은 케네디 시절의 섬뜩한 통찰이었다. 존 캐리의 노미네이션 바로 다음날 전략적으로 공개된 드미의 이 떠들썩한 영화가 얼마나 미국의 정신을 반영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개봉했지만 흥행에 성공한 1962년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드미의 개작에 놀라기보다 웃을 것이다. 조작된 군대 영웅 레이먼드 쇼(리브 슈라이버)와 그의 상관 벤 마르코(덴젤 워싱턴)는 한국전쟁에서가 아니라 사막의 폭풍 작전이 수행되는 동안 적들한테 세뇌됐다. 양아버지가 아니라 쇼 자신이 부통령 후보이며, 지독하게 마키아벨리적인 어머니(메릴 스트립)는 배후에서만 존재하는 조종자가 아니고 뉴욕의 상원의원이다(혹자들이 스트립의 빠른 말투를 가진 강한 여성상이 힐러리 클린턴을 닮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마 스트립의 재치있는 연기보다 클린턴 의원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할 것이다).

리메이크에는 매카시와 같은 선동가가 없고 대신 선동은 국가적 규모의 엔터테인먼트로 분산되고 내재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악당들은 할리버튼과 칼라일, 파랄락스사(앨런 파큘라의 <암살단>에 등장하는 기업)를 합쳐놓은 듯한 맨츄리안 글로벌사로 대체됐다. 쿠데타는 “정권 교체”로 바뀌었고 빨갱이들에 대한 공포는 “최초의 개인이 소유하고 조종하는 미국 부통령”에 대한 공포가 되었다. 꾸준한 테러와 반테러의 논쟁을 배경으로 감시받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공포가 한층 조성되며 더욱 히스테릭하고 파블로프적인 애국 행사들을 보게 된다.

독창적인 결말을 영리하게 이끌어내고 있는 드미는 스릴러를 찾는 관객을 위한 내용임에도 그 이상을 성취하고 있다. 지성적인 영화로 이 작품은 그의 장점을 보여준다. 배우들에 대한 그의 통솔은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하다(슈라이버는 로렌스 하비처럼 순수한 환멸감을 주지 못하지만). 워싱턴과 슈라이버, 둘 다 프랭크 시내트라나 로렌스 하비보다 더욱 감정적으로 미묘하고 좀더 날카로운 연기를 보여주고, 스트립은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낸다. 킴벌리 엘리스는 재닛 리가 맡았던 비현실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던 역할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끔 연기해낸다. 사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십수년간 다큐멘터리와 코미디, 최루성 영화들을 만들어온 드미에게 <양들의 침묵> 이후 가장 뛰어난 극영화다.

우연히도, <양들의 침묵> 자체는 첫 걸프전쟁 당시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 한창일 때 공개됐던 이 영화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를 열광케 한 하나의 현상이었다(당시 회의적이었던 조너선 로젠봄이 지적한 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표백된 전쟁을 벌이던 미국인들은 진정 엉뚱하게도 괴물 같은 한니발 렉터에게 집단적인 매료를 보이고 있었다. 로젠봄은 “우리가 현재 우리 주변의 연쇄살인범들 모두보다 더 큰 속도로 사람들을 주저없이 죽이고 있다”라고 렉터의 비평적인 팬들에게 상기시켰다). 일면 새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돌아온 억압된 양들, 미국판 “어둠의 심연” 한가운데 실재하는 광기를 대표한다. <양들의 침묵>에서도 여성 상원의원이 악마의 제단에 바쳐진 자식을 발견했었다.

원작 <맨츄리언 켄디데이트>는 냉전의 불안함을 담았지만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바꾼 1968년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 4년 뒤 조지 월리스의 총살을 예견케 했다. 하지만 요즘은 정치 지도자의 전략적 제거를 통한 정권이란 이슈도 아니다. 역사에 묻힌 비밀요원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슈가 아니다. 따라서 새 <맨츄리언 켄디데이트>의 가장 예스런 측면은 구식 호세 델가도 스타일의 두뇌이식인데 덴젤 워싱턴의 발견물을 조사하던 행동주의 과학자 브루노 간츠가 “이건 이론으로만 가능해”라고 하니 우스꽝스럽다(호세 델가도는 두뇌의 전기자극에 대한 반응을 연구한 과학자, 소의 뇌에 전자장치를 심어 행한 엽기적 실험으로 유명하다-역주).

현재의 음모가 아무리 뻔뻔스럽고 얄미워도 정치적 지도층을 돈을 주고 사는 일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시기적으로 존 에드워드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희석화하기 위해) 국토안보청이 슬그머니 대통령 선거 취소의 위협과 테러 경보를 발표하는 걸 보면 어쩌면 단지 암살자들이 프로그램된 게 아니라 정치체제 자체가 프로그램된 게 아닌가 싶다.

(2004. 7. 29.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번역 이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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