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4월10일(일) 밤 11시45분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는 전반적인 침체기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런 진흙 속에서도 가끔 진주 같은 영화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김수용의 <안개>가 그 시절 그 진주 같은 영화 중 하나이리라. 이 영화는 당시 청년문화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김승옥이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으로, 시나리오도 김승옥이 직접 썼다.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한명인 윤정희의 초기 모습, 발랄하고 앙증맞으면서도 섹시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대사들이 무척이나 세련됐다. ‘안개가 명산물인 무진’으로 상징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꿈같은 공간으로서의 무진과 일상의 공간이자 또 다른 탈출의 공간이기도 한 서울이 대비되며, 또 무진에 내려온 윤기준의 지금 모습과 좌절하면 침잠했던 과거 그의 모습이 계속 오버랩되면서 잠시 동안의 탈일상으로 잊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대의 명촬영감독 장석준이 그려내는 흑백화면은 참 잘 찍었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다. 주제가 <안개>의 기타 변주가 인상적인 신성일과 윤정희의 바닷가 집 정사장면에서는 흡사 프랑스영화 같은 느낌도 준다. 영화 내내 다양한 변주를 해가며 흐르는 이봉조의 곡과 정훈희의 목소리로 윤정희가 부르는 주제가도 영화의 멋을 한층 살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