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열정 위에 `필`을 꽂다, <화산고>의 장혁
2001-07-11
글 : 이영진

벌써 세시간째 저러고 있다. 허공에 구부정하게 매달린 채, 굵은 빗줄기와 한패가 된 살수차의 물세례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하나, 누구도 안쓰러운 표정을 주지 않는다. 장혁(26) 역시 “이 정도로, 뭘” 하는 투다. 10개월째 당하고 있는 피아노줄, 물고문이니 이젠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에 발붙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뜨고 보니 손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엔 그렇게 헤맸어요. 지금이야 제 몸무게를 단전으로 버틸 수 있을 정도이니.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지요.”

촬영장에서 장혁의 별명은 ‘열정’이다. 고된 한컷을 마치고서도, 힘이 남는지 곧바로 김태균 감독 옆에 붙어 요것조것 따져묻는다. “기를 이렇게 뿜으면 되나요?” 감독이 다음장면 시범을 보이면, ‘감’이 잡힐 때까지 몇번을 반복한다. 현장에서 기절한 것만 여섯번인 이 청년의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만화적인 캐릭터가 맘에 들었어요. 사실적인 스토리가 아니니까, 캐릭터 역시 어디서 가져와서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감독님 상상과 내 상상과 스탭들 상상이 뭉쳐서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재미있어 보이죠?”

<화산고>에서 장혁이 맡은 역할은 엄청난 기공의 소유자인 경수. 가는 곳마다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려 결국 퇴학을 당하고 전학을 다니기 일쑤인 고등학생이다. “제 고등학교 시절이요? 에이, 묻지 마세요. 그 이야기 하면 거칠어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보다 ‘운동’이 좋았다는 그는 중·고교 시절 마라톤과 기계체조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마냥 좋았어요. 아버지가 한번 해볼래 했던 것이었는데, 언제서부턴가 욕심이 붙더라고요.” 연기를 시작한 것도 비슷한 경로였다. 운동을 그만두고 다른 걸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아버지의 강권을 끝내 받아들인 뒤, 미술학원을 들락거려보기도 했고, 결국 시원하고 말끔한 외모 덕에 연기라는 것에 도전하게 됐다. “대학 들어가기 전 부산에서 연기학원을 다녔어요. <친구> 보면 아부지 잘 계시지 하던 이재용씨가 제 사부였지요.”

고심한 끝에 연기를 택했지만, 장혁은 항상 강한 눈빛의 반항아로만 팔릴 뿐이었다. 영화 <짱>에서도, 드라마 <학교>에서도 그는 정우성을 닮은 외모만이 돋보였다. 그런 그가 슬슬 몸을 풀기 시작한 때는 드라마 <왕룽의 대지>. 사고뭉치이지만, 속깊은 재수생 역할을 그는 근사하게 소화했다. “촬영 중간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됐는데, 이종한 PD님이 한손엔 포도 주스, 또 한손엔 대본을 들고 오셨더라고요. 다 그 덕이죠.” 안성기나 최민식처럼 인간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는 <화산고> 촬영이 끝나는 대로 “보자마자 욕심이 나 덥석 물었다”는 <정글쥬스>의 기태로 옷을 갈아입는다. 청량리역을 배회하는 어리숙한 조직 똘마니이지만,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있는 인물. 밤샘 촬영을 끝내고도 스탭들과 어울려 삼겹살에 소주 한잔 걸친 채, 영화 이야기로 아침을 맞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면,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머지않아 단단한 옹기들을 구워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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