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구성주 감독의 먼길 [2]
2005-04-12
글 : 이영진

TV보고 가슴에 묻어뒀던 엄마이야기 제작 결심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과의 불화는 예정된 것임을 직감했다는 아웃사이더였지만, 언제까지 홀로 버틸 순 없었다. 무엇보다 카메라 뒤에 서고 싶었다. 지난해 3월, 신생제작사 필름뱅크를 만나 “그는 똑같은 상업영화의 꼴로 만들긴 싫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라고 설득하면서 캐릭터들에 대한 설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더하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캐스팅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애초 그는 엄마 역에 비전문 배우를 쓰려고 했다. 전라남도 영광의 한 촌로를 염두에 두고 섭외를 위해 만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집으로…>의 성공을 적용할 순 없었다. 엄마 역에 할당된 대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두심 선생을 찾아뵈었고,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 이 영화로 상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 칸영화제도 아니고 대종상도 아닙니다. 노벨평화상입니다. 보고 나서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소도둑 같은 외모 때문에 혹시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는 고두심은 버벅거리며 눈을 껌벅이는 그의 순진한 모습에, 또 엉뚱한 발언에 끌려 출연을 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진수하긴 했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촬영횟수는 불과 총 35회. 장마철에 촬영을 진행해야 했지만 다행히 날씨는 그의 편이었다. 아쉬운 건 욕심내는 스탭들과 배우들을 현장에서 배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보니 필름을 6만자 썼더라. <그는 나에게 지타를…>이 7만자 썼는데 그것보다 덜 쓴 거다. 전 장면과의 연결 때문에 광선을 기다려야 한다는 촬영감독에게 괜찮다고 했다. 연기자들이 한번 더 테이크를 가자고 할때 됐다고 했다. 많이 서둘렀다. 이상하게 회차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다. 완성도보다는 영화를 제때에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 같다.”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순항을 하나 싶더니 70% 정도 찍었을 때, <엄마>의 여정에 한 차례 위기가 발생했다. 제작사와 투자사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잠시 촬영이 멈춰섰던 것이다. 이날 구 감독은 배우들과 스탭들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울었다. 옆에 있던 조감독이 울었고, 앞에 있던 배우들도 따라 울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돼나. 자기 비하가 밀려왔고, 자기 연민에 빠져 울었다. 그런 내가 싫어서 이날 탁자를 내리쳤는데 손이 망가져 보름 동안 고생했다. 하하. 그날 집에 갔는데 마누라가 그러더라. 다음엔 술상을 엎든지 물건을 던지라고. 괜히 자해하지 말라면서.” 감독 혼자서 돈 구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8년 전의 중대한 어려움과 비교하면 약과였다면서도 그는 “전엔 제작사도 투자사도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미뤘다. 그래서 중간에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다. 요즘엔 감독의 운신의 폭이 너무 좁더라”고 말한다.

“다음엔 아주 더럽고 추악한 영화를 하고 싶다”

개봉을 앞두고 관객의 반응도 궁금하지만, 구 감독은 주위의 만류로 삭제된 장면 하나가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엄마의 여정 중에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를 만나는 설정이 있었다. “우리한테 만화로 유명한 마르코를 우연히 엄마 일행과 만나게 하면서 거기에 ‘아득한 바다 저 멀리∼’ 하는 주제가를 깔려고 했다. 그래서 찍긴 했는데 결국 편집 과정에서 빠졌다.” 상업적인 고려로 제목이 <먼길>에서 <엄마>로 바뀐 것은 한발 물러서 이해하더라도, 결국 극장에 내걸리지 못한 이 장면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제작사나 투자사에선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는 것이고 그걸 이제 나도 안다. 예전엔 홀몸이었고 이제는 처자식이 있는데 이 영화 흥행되어야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면 내 뜻을 보여줬다고 뿌듯하면서도 완전하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매끄러운 감동 스토리를 원한다면, <엄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음은 거칠고, 화면은 촌스럽고, 화술은 투박하다. 그런데 그 허술함 사이로 인물들의 감정이 삐져나온다. 그 군더더기를 보는 것이 밉지 않다. 영화 속 가족은 하나같이 착해빠진 비현실적인 인물들이지만 위선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이 영화의 이상한 힘은 어쩌면 구 감독 스스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뚱딴지 같은 판타지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고집인지 몽매인지 모르겠다. 내 영화에는 불편한 과장과 허풍이 있는 건 사실이다. 리얼리티의 상식으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내게 에둘러 말하거나 다르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직접화법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세상이 그런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구 감독은 자신에겐 과대망상이 있다고 말한다. “점쟁이들이 조만간에 잘된다고 했다. 그거 하나 믿고 자기 최면으로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확신이 생긴다. 지금까지 그렇게 버티며 살아왔다.”. 그걸 밑천 삼아 그는 다음 영화 준비에 나설 생각이다. 무엇부터 할진 정해지진 않았다. 그동안 차곡차곡 저장해둔 곳간의 아이템만 해도 수가지다. “지금 제일 마음에 가는 건 지독한 악인들이 나오는 영화다. 준비하고 있는 시나리오 중에 그런 게 하나 있다. <엄마>와 달리 아주 더럽고 추악한 영화를 한편 하고 싶다.” “다음 영화 개봉예정은 (8년 뒤인) 2013년이니 그때 보자”라는 농으로 끝인사를 대신하는데, 속으론 더 빨리 다른 영화를 들고 관객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뭉툭한 코 끝에 달랑거리는 게 눈에 보인다.

구성주 감독이 꼽은 잊지 못할 장면

고두심과 꽃과의 대화

구성주 감독은 손병호, 김유석이 각각 맡은 두 아들이 갈 길 몰라 헤맬 때 성큼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을 찍은 장면과 함께 엄마 역의 고두심이 꽃을 보면서 혼잣말하는 장면을 첫손에 꼽았다. “처음엔 고 선생님이 10년만 더 늙으셨으면 했다”는 감독은 이 장면 촬영 때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이는 세상을 너무 모르는 어린아이와 세상을 너무 많이 안 노인뿐인데 고 선생님의 발성에서 세상을 깨우친 노인의 뉘앙스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살아났다”고 말한다. 오줌 싸다 개울에 빠져죽는 아버지가 등장하는 과거 회상신은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은 폭소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건 어머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기억 중 슬픔은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지고 이제 웃음만이 남았다. 삶과 거리를 둘 만큼 여유를 갖게 된 엄마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장면 촬영 때 아버지 역의 하재영은 너무 오줌 줄기가 세지 않냐고 했지만, 감독은 “거침없이 저 먼 산까지 쏘라”고 주문했다고. 대부분의 컷들이 많은 테이크를 소요하지 않았지만, 여정 중에 셋째딸인 연화 스님(반민정)과 엄마가 재회하는 장면은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3일이나 공을 들인 장면이다. “100번 찍어서라도 제일 좋은 걸 건지고 싶었다”는 게 감독의 말. 사운드 체크를 위해 현장을 방문했던 씨네믹스 김영호 대표는 “해가 지려고 하면 석양을 잡으려고 감독이 미친 듯이 혼자서 고개를 향해 뛰어갔다”고 전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