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눈물은 근육을 잠식한다, <주먹이 운다>
2005-04-13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활극과 비극의 가능성보다 신파를 택한 <주먹이 운다>

주먹-하드 보디의 생성

3월의 마지막 월요일, 분당 서현역에 갔다. 지하철을 타고 서현역에 도착, 삼성플라자 백화점을 지나면 <주먹이 운다>의 강태식(최민식)이 인간 샌드백이 되어 1만원어치의 주먹을 맞는 광장에 도착한다. 영화에 등장했던 ABC마트가 보인다. 봄날 저녁치곤 바람이 아무래도 차다. <주먹이 운다>의 도입부에서 강태식은 이 신도시의 풍경 속으로 확성기와 권투 글러브를 가지고 들어선다. 블리치 바이 패스거나 디지털 색보정이거나 간에 강태식을 둘러싼 풍경은 거칠고 탁하다. 과소비를 권장하는 시대, 헝그리 복서와 분당 신도시간의 대비는 처연하다기보다는 안쓰럽다. ‘헝그리’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헝그리 복서의 성공 신화를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 시대, 혹은 그 헝그리 복서를 영웅으로 등극시키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지켜보게 하는 진정한 관심은 강태식과 류상환(류승범)의 신화적 비상에 놓여 있지 않다. 또 추락에 있지도 않다. 헝그리 복서의 신화 쓰기의 유효함은 의심되며 그들의 추락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래된 경구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를 변주한다.

<주먹이 운다>는 한국 활극/액션영화에 거의 유례없는 분량(그래도 아직은 충분하지 않은)의 훈련장면을 담고 있다. 영화는 40대의 강태식과 20대의 류상환의 단단한 몸, ‘하드 보디’(Hard Body)의 생성을 지켜본다. 이것이 활극영화로서의 <주먹이 운다>가 가질 수 있는 남성적 활력이다. 주먹과 몸의 세계인 것이다.

운다-눈물을 갈구하는 남성 신파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나 또 어딘가 다른 데 있다. 제목을 생각해보라!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하드 보디’를 비정한 ‘하드-보일드’(hard- boiled)로 바꾸는 대신 영화는 오히려 멜로드라마 좀더 적극적으로는 신파로 향해간다. 남성 신파가 되려 하는 것이다. 눈물을 갈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제스처 등이 정말 중요한 것이 멜로드라마다. 멜로드라마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있다. “소리와 분노의 이야기.” 예컨대 음악이나 음향이 스크린을 찢을 듯 비장하게 울릴 때 분노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분노로 따지자면 이 멜로드라마보다 더한 것이 있다. 분노를 넘어선 원한이다. 그 원한을 담아 한국 공포영화에서 여귀는 여곡성을 내지른다. 반면, 액션영화에서 내지르는 소리의 역할은 다르다. 예를 들자면, 이소룡이 절권도에 기합을 넣을 때, 그것은 기의 상승이다. 여자는 귀신이 되어서야 소리를 지르고, 남자는 힘을 쓰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영화 <주먹이 운다>는 주먹을 내지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안다. 또 강태식도 류상환도 이소룡처럼 기합을 내지르지 않는다. 다만, 주먹이 울어야 한다. 주먹이 “울기” 위해선 액션영화를 넘어서는 다른 장르들의 관행이나 그 장르에서 주로 사용되는 감정, 감성, 정동의 활용이 필요하다. 즉, 소리와 분노와 원한을 멜로드라마적으로, 신파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신파는 폄하적 의미가 전혀 아니다. 신파는 근본적으로 세상 풍속과 인정비화를 제재로 하는 통속물이다. 말 그대로 세상과 한통속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신파영화로서의 <주먹이 운다>가 대면해야 하는 지점은 세상의 인정을 짚어내고 , 그 인정대로 (못)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주먹이 횡행하는 활극과 눈물을 펑펑 쏟게 하는 신파, 과연 이 영화는 이 두 장르를 어떻게 절묘하게 결합시킬 것인가? 또는 결합시키지 못할 것인가? 부정의문문에 얼른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주먹이 운다’가 사실은 ‘아이고, 내 주먹이 운다. 울어’(그런데 울고만 있으련다)에서처럼 주먹을 쓰지 못하는 자의 한탄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한 일이 있어서, 치거나 때리고 싶지만 참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액션이 아니라 인액션(in-action), 즉 무기력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또한 이 제목이 뜻하는 바일 수 있다.

<주먹이 운다>를 보는 자 누구인가?

그러나 제목에서 핵심을 유추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활극으로부터 신파쪽으로 횡단하면서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특별한 관객위치의 설정이다. 즉, 이 영화에서 훈련 끝에 만들어진 고달픈 스펙터클은 일반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꼭 누구에게 보여야 한다는 절박한 소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 아시아 은메달리스트였던 강태식은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에게 쫓기며, 두당 1만원의 인간 샌드백이 된다. 조기 알츠하이머를 앓기 때문에 시력도 가물가물하고 건망증도 심하지만 아들과 아내에게 자신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신인왕전에 나간다.

또 도둑질과 구타, 강도짓 등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류상환이 권투연습에 매진하고 신인왕전까지 나가기로 결심하는 것은 할머니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해서다. 영화는 활극과 신파를 잇는 장치로 활극의 스펙터클을 신파적 연민으로 감상할 수 있는 가족, 혈육을 이상적 관객으로 배치한다. 말하자면 <주먹이 운다>는 남성의 근육질 몸, 하드 보디를 남성적 나르시시즘이 새겨진 표면으로 본다거나, 남성들의 동성사회적 욕망의 시선이 새겨지는 곳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수잔 제퍼드가 “하드 보디: 레이건 시대 할리우드영화에 나타난 남성성”에서 지적하는 람보와 같은 근육질의 백인 남성 영웅이 레이건 시대의 군사주의와 리비아와 그라나다 침공을 정당화시켜주었다는 분석에서 보이는 “근육질 몸, 군사주의, 국가주의”라는 등식으로 다행히 걸어들어가지 않는다. 또는, 단단한 육체를 여성의 시선 앞에 에로틱하게 전시하지도 않는다. 류상환의 훈련장면에서 몇번 보여지는 나체가 그런 혐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영화 전체를 흐르는 기조는 아니다. 강태식과 류상환은 신인왕전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아, 익명의 여자들을 매료시키려는 것도 아니며 혹은 굳이 대문자 남자 되기에 성공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각자 아들과 할머니에게 말걸려 한다.

길거리로 나앉게 된 강태식과 사회에서 격리되어 감방에 있는 류상환의 사회적 재-주체화 과정은 아들과 할머니와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상호 주체화 과정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이 남성 육체에 부가하는 남성 나르시시즘, 동성사회성 그리고 에로틱한 대상화 등을 피해나가면서, 몸의 훈련을 통한 상징질서로의 재진입을 시도한다. 그 질서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각자 아버지와 손자의 자리다.

강태식과 류상환의 마지막 신인왕전 대결은 류상환의 판정승으로 끝나지만, 사실 둘 다 원하는 것을 얻는다. 강태식은 아들을 안고, 류상환은 할머니를 안는다. 그리하여 강태식은 가정 없는 이빠진 부권이나마 아들과 아내에게 자신의 아버지/남편 됨을 확인시키고 류상환은 자신이 완전 양아치만은 아님을 증명한다. 물론 신인왕전 결승전에 나갔다고 해서 이들은 결코 아들이나 아내 그리고 할머니에게 이상적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강태식은 아들에게 일일 교사로 학교에 강의 나왔다가 ‘삶’의 맞춤법도 잘 몰라 ‘삼’으로 쓰는 무식쟁이다. 아내 선주(성이 나오지 않음, 서혜린)는 강태식에게 연민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신과 아들의 생활을 해결해줄 남자와 재혼을 앞두고 있다. 병상에 누운 할머니는 ‘우리 손자는 캐나다에서 아주 성공해서’라는 손자의 성공담을 가공한다. 사실 이 남성 활극 신파에서 가장 궁지에 몰리는 것은 아내 선주인데, 아들과 할머니가 이 영화가 구조적으로 마련해놓은 이상적 관객 위치로 정확히 들어가 태식과 상환이 펼치는 활극의 신파 관객이 된다면, 선주의 자리는 기껏해야 애매모호하거나 부정적이다. 그러나 물론 그녀에게 가해지는 영화상의 질타는 부당하다.

여하간, 영화 내내 교차편집되던 태식과 상환이 각자 어렵게 신인왕전 결승전까지 올라와 6라운드까지 끝까지 싸우고 또 판정으로 승패를 가리는 결말은 봉합이라면 봉합이고, 화해라면 화해고, 협상이라면 협상이고 미온적 해결이라면 그렇다고 할 만한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도 그랬지만, 류승완 감독은 매우 센 이야기를 의외로 착하게 마무리한다. 이런 착함을 탓할 사람은 물론 없다. 그러나 스포츠영화 장르로 보거나 영화의 구조적 특징으로 볼 때 마지막 신인왕전의 대결 시퀀스들은 거의 독약이다.

카메라가 절박한 두 남자를 쫓아 링에 올라갔을 때 관객이 원하는 것은 판정으로 가려지는 승패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전반부와 중반부에 인생의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성에 대한 매우 센 처방을 이미 내렸었다. 예를 들어, 감금되어 있는 아들 상환에게 자신이 군대 생활할 때가 생각난다면서 달달한 빵을 넣어주었던 아버지(기주봉)의 죽음을 보자. 그는 공사 현장에서 위에서 떨어진 자재에 맞아 뜻하지 않게 즉사한다. 사실, 이 장면의 충격은 <바람난 가족>에서 유괴범이 아이를 던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사정 보지 않는 삶의 냉혹함이다. 태식 역시 너무 무리하게 샌드백 생활을 하느라 40살에 이미 조기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여 건망증과 시력저하를 겪는다.

이러한 비극과 절망이 상연된 뒤, 영화의 마지막이 인간 승리로 마감하는 것에 감동받기는 사실 어렵다. 더구나 태식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뒤, 그가 훈련에 돌입한 시점부터 그 증세는 놀랍게도 관객의 눈앞에서 싹 사라진다. 이렇게 활극과 비극, 신파 속에서 영화 <주먹이 운다>는 마지막 활극도 비극도 아닌 신파를 선택한다. 물론, 신파가 나쁠 것은 없으나 활극으로 가는 지난한 훈련의 과정도 있었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등장했던 바, 그 통속성은 세상의 질서에 고개 조아리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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