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감독이 ‘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람의 취향과 선호 대상은 고정되게 된다. 비평가들이 사전에 규정된 ‘작가’라는 프리즘으로 영화들을 바라보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작가 자신이 그 프리즘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앨프리드 히치콕을 보라. 초기만 해도 그럭저럭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던 그가 거장이 된 뒤부터 서스펜스 장르에 갇혀버린 건 꼭 주변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그가 툭하면 비장르 감독의 자유를 부러워했다고 해도 말이다.
김지운 역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으로 이어지는 그의 블랙코미디 전작들의 성향과 거의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장르영화인 <메모리스>나 <장화, 홍련>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작가’의 자의식엔 거의 무관심한 듯했다. 아마 <장화, 홍련>이 개봉 당시 예상외의 혹평에 시달렸던 것도 그런 비평가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평론가들도 자기가 쌓아놓은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다음 작품인 <달콤한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지운 영화’다. 그냥 김지운 영화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김지운 자신이 그 영화를 ‘김지운 영화’로 디자인한 게 분명하다. <반칙왕>으로 대표되는 그의 이전 영화들을 좋아하는 팬들이나 관객은 별 생각없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외양만 본다면 <달콤한 인생>엔 그렇게 노골적으로 자의식이 반영된 흔적은 없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식 폭력과 말장난으로 양념한 장 피에르 멜빌식 필름누아르인데(김지운 자신은 멜빌과 <킬 빌>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영화라고 말한 적 있다), 지금까지 그는 그 장르에 관심만 표해왔을 뿐 단 한번도 이 장르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컴컴한 유머를 끄집어내는 그의 개성은 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건 강요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나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자잘한 단서들이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평론가들이 난폭한 블랙코미디로 정의한 기존 틀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이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리는 건 이게 바로 <장화, 홍련>이라는 영화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김지운은 작고 하찮은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일로 번져가는 내용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주제라고 하는데…. 사실 그게 그렇게까지 뚜렷하지는 않다. 아마 <조용한 가족>과 <장화, 홍련>을 엮는 데 이 주제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메모리스> <커밍아웃> <반칙왕>에도 통할까? 말을 그럴싸하게 한다면 못할 건 없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동시에 떠올릴 만한 주제는 아니다. <달콤한 인생>에서도 주인공 선우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지우려고 한다는 행동 동기는 <장화, 홍련> 때만큼 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봐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를 먼저 만든 뒤에 그에 맞는 구체적인 줄거리가 따라온 것 같다.
<장화, 홍련>의 쌍둥이 영화 <달콤한 인생>
여기서 자꾸 <장화, 홍련>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그건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가 <장화, 홍련>의 거울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조와 공통점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의도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먼저 공통점을 보자. 두 영화의 주제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장화, 홍련>의 수미와 은주,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강 사장은 모두 비교적 하찮은 일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실수와 의사소통의 차단 때문에 피 튀기는 비극으로 서로를 몰고 간다. 하지만 이 기초적인 주제와 기본 설정을 제외하면 두 영화는 거의 완벽하게 반대이다.
우선 영화의 성별. <장화, 홍련>은 무력한 아버지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여자 캐릭터들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기능적인 역할만 간신히 하는 여자 한명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액션의 진행 방향 역시 반대이다. <장화, 홍련>은 기본적으로 내성적이다. 모든 액션은 겹겹으로 쌓인 위태로운 정신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과정이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모든 폭력은 육체적이고 외향적이다. 당연히 캐릭터의 깊이도 달라진다. <장화, 홍련>의 수미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다층적인 캐릭터라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강 사장은 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수미만큼이나 괴물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얄팍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성격 역시 정반대라면 반대이다. 수미는 기본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캐릭터였다. 수미가 겪는 모든 일들은 따지고 보면 그런 자기혐오에서 탈출하려는 의미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선우와 강 사장은 둘 다 노골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자기 확인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능력이 없다. <장화, 홍련>의 호사스러운 화면이 주인공의 자기혐오적인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달콤한 인생>의 때깔 고운 화면은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한다. 한마디로 이 모든 건 ‘폼’인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자들은 ‘폼’ 빼면 그냥 죽는다.
순전히 불안정한 정신의 고뇌로만 구성된 <장화, 홍련>과는 달리 <달콤한 인생>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민도 쌓일 만큼 오래 남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화엔 고민이 쌓이는 정도를 재는 척도까지 있다. 영화 중간에 선우가 차를 타고 가다가 욕을 하는 건달들을 지나치는 장면을 보라. 선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차를 따라잡아 애들을 팬다. 건달들이 욕을 하는 순간부터 선우가 그 차를 따라가는 순간까지가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자발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은 죄의식처럼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유일한 감정은 억울함과 불쾌함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기네들이 세상 중심에 앉아 있는 줄 아는 참을성 없는 쩨쩨한 어린애들인 것이다.
이 완벽한 대칭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종의 게임일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중인격 증상이 있는 청개구리처럼 자신의 전작을 뒤집는 영화를 만드는 건 새 작품의 아이디어를 여는 쓸 만한 방식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 <달콤한 인생>은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직범죄라는 음습한 직업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대한 꽤 정확한 분석이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얄팍한 사고와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즘 그리고 그들을 거름삼아 자라는 똥폼. 선우가 자신의 호사스러운 방 안에서 섀도 복싱을 하는 마지막 신은 이 주제를 고래고래 외쳐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감독이 좋아하는 장 피에르 멜빌을 끌어들인다면, 이 영화는 비교적 심각한 <암흑가의 세 사람>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의 로맨티시즘을 시치미 뚝 떼고 은근히 놀려대는 경향이 있는 <사무라이>쪽에 더 가깝다.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멋있는 전문가인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무라이>의 제프 코스텔로와는 달리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도대체 숨을 구석이 없지만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삼부작도 나올까
그러나 <달콤한 인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는 지금 내가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아니다. 다시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전작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의 이 완벽한 거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분이 나에게 묻는다면, <달콤한 인생>이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외쳐대는 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우선 <달콤한 인생>은 <장화, 홍련> 역시 ‘김지운 영화’의 일관적인 흐름 속에 통합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는 역할을 한다. DVD에 따로 평론가들에 대한 반박 섹션까지 마련할 정도였으니, 김지운이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이 영화를 가볍게 넘긴 평론가들의 생각을 교정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컴컴한 폭력과 어처구니없는 유머가 결합되어 있는 모범적인 김지운 영화를 만들면서 <장화, 홍련>의 주제를 뒤집어 재활용한다면? 그리고 그게 처음부터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걸 밝힌다면? 그건 꽤 재미있는 반격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멋있다. 생각해보면 <조용한 가족>부터 꾸준히 탐구해왔다는 것도 사실인 듯하고. 그렇다면 <달콤한 인생>으로 일단 기반을 확인해본 뒤 다시 본격적으로 확장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전의 작품에도 그런 주제가 숨어 있다는 걸 역으로 읽어내어 이론 무장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긴 역사란 언제나 현대를 구심점으로 쓰여지는 법이니, 이 역시 특별히 신기한 일은 아니다.
독심술사가 되어 감독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는 한, 이 모든 건 그럴싸한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꽤 괜찮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추측이기도 하다. 박찬욱이 복수 삼부작을 찍는다면, 김지운이라고 ‘돌이킬 수 없는 일’ 삼부작을 찍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삼부작은 대부분의 경우 시리즈에 대한 자의식이 가장 심한 3편이 가장 약한 법이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세 번째 영화가 더 가능성이 있다. 의도적이고 소재와도 완벽하게 맞긴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결코 깊이있는 작품이 아니다. 좀더 깊이있고 입체적인 시도를 할 영역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