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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서사를 넘어 타자를 인식하다, <마파도>
2005-04-13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공동체에 포획된 개인을 보여주는 <마파도>

<마파도>는 재미있다. 크게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면서도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이는 물론 연기력 덕분이지만, ‘할머니들만 사는 섬에 도시 남자들이 발목 잡히는’ 역전된 관계에서 기인된 바가 크다. 도시 주인공이 시골로 가는 설정들은 많지만, <마파도>가 <집으로…> <그녀를 믿지 마세요> <선생 김봉두> 등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시골 사람들과 외부인간의 역관계이다. 시골뿐 아니라 <달마야 놀자> <목포는 항구다> <두사부일체> <잠복근무>처럼 외부인이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면서 겪는 이야기들은 꽤 많다. 이들 영화들을 외부인과 공동체간의 역관계를 중심으로 범주화해보자.

외부인이 공동체에 투입되는 서사의 네 가지 범주

두 가지 변수를 적용할 수 있다. 첫째, 변화의 유무에 따라(외부인이 변한다//변하지 않는다) 둘째, 권력의 유무에 따라(그가 영웅이다//반영웅이다) 나눌 수 있다(단, 외부인의 내면적 변화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변수를 조합하여 2x2=4 네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첫째, ‘변하지 않는 영웅’으로, 외부인이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자기 식대로 행동하여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선생 김봉두>, <마지막 늑대>,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의 우리영화와 <시스터 액트>, <시티 오브 조이>, <금발이 너무해> 등의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둘째, ‘변화되는 영웅’으로, 외부인이 공동체의 질서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공동체 내부에서 성공한다. <목포는 항구다>, <잠복근무>등의 우리영화와 <지옥의 묵시록>, <라스트 사무라이>, <늑대와 함께 춤을>, <퀸카로 살아남는 법>, <화이트 칙스> 등의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셋째, ‘변하지 않는 반영웅’으로, 외부인이 공동체의 질서와 섞이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로, 자신도 공동체도 변화하지 않는다. <집으로...>, <그들도 우리처럼>, <아홉살 인생>등의 우리영화와 <자토이치>같은 검객영화, 서부영화 등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 ‘변화되는 반영웅’으로 외부인이 공동체의 질서에 포획되어 포로가 된다. 한국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시실리 2km> <마파도> 그리고 외국영화 <도그빌> 등.

첫 번째 범주에서 공동체는 외부인의 ‘개혁의 대상’이다. 공동체는 외부인의 유입으로 요동치고 변화를 겪는다. <선생 김봉두>에서 시골 사람들은 그에 의해 계몽되고, 선동되고, 기만당한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마지막 늑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시골뿐 아니라 <시스터 액트>의 수녀원이나 <금발이 너무해>의 하버드 법대 등 유서 깊은 공동체들도 얼마든지 호락호락한 ‘대상’이 되며, <시티 오브 조이>에서처럼 제3세계는 백인의 제국주의적 환상을 위해 ‘봉헌’된다. 여기에서 공동체의 중력장은 단 한명의 침입자에 의해 교란될 만큼 허술하다.

두 번째 범주에서 외부인은 기존 공동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곳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들은 적응의 귀재일뿐더러 어떤 규칙으로든 이길 수 있는 강자들이다. 여기서 공동체의 문화가 존중되는 듯 보이지만, 기실 외부인의 완벽한 동화는 그들이 ‘보편적 강자’임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지옥의 묵시록> <늑대와 춤을> <라스트 사무라이> 등의 백인 추장과 사무라이는 오리엔탈리즘과 백인우월주의의 색다른 버전이다. <잠복근무>에서 여경(女警)이 오직 주먹으로 ‘쌈짱’ 문화를 평정하는데, <퀸카로 살아남는 법> <화이트 칙스> 등이 보여주는 고도의 문화적 접근과 비교하면, 학교사회를 너무 만만히 본 듯하다. 한편 <목포는 항구다>에서 주인공은 경찰로서의 지식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조폭사회에서 성공한다.

세 번째 범주는 외부인이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거나(범주1) 대단한 적응력을 발휘하여(범주2)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는 ‘외부로부터 온 영웅서사’의 틀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대단한 자의식을 발휘하여 공동체에 포섭되지 않고, 끝끝내 외부인으로 남는다. <집으로…>의 소년은 불리한 환경에 처했는데도 할머니나 이웃 아이들과 사귀지 않는다. 그는 시골에 관심이 없고, 자기 문화에 대한 오만으로 끝내 동화되지 않는다. <아홉살 인생>의 소녀도 그곳의 이질적인 존재로 머물다 떠난다(나중에 반성하는 문제는 논외이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수배자도 ‘그들도 우리처럼’ 싸우며 살아가는구나… 관조하다 탄광촌을 떠난다. 무협영화나 서부영화에서 잠시 머물다 표표히 떠나는 것은 기본이다.

네 번째 범주에서 외부인은 공동체에 대항하기도 하지만 결국 포섭된다. 공동체에 섞이지 않는 오롯한 개인으로 남았던 세 번째 범주가 여전히 자아 중심의 사고방식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네 번째 범주는 타자 중심의 혁신적인 사유이자, 가장 현실감 있는 서사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시골 초등학교 교실도 권력의 중력장이 강고한 왕국임을 보여준 정치 우화였고, <도그빌> 역시 외부인과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통찰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단, <도그빌>의 마지막의 총질은 여전히 외부인과 대타자(신)가 심판과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자아중심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이는 타자 중심의 사고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타자 중심의 관계론을 촉구하는 <마파도>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코미디영화에서는 네 번째 범주의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들은 쉽사리 절을 접수하지 못하고, 갈수록 동화되다 마지막엔 숫제 한명이 남는다. <두사부일체>에서 조폭은 “삥”을 뜯겨가면서도 ‘적응’을 목표로 안간힘을 쓰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커밍아웃’한다. <…홍반장>에서는 시골의 질서에 적응치 못하는 주인공을 ‘무능’하게 재현하고, 나아가 <시실리 2km>의 조폭은 좌충우돌 끝에 시골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장악된다. 그리고 마침내 <마파도>의 주인공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섬에 내리자마자 할머니들에게 완전히 ‘잽히고’ 만다. 더욱이 <시실리 2km>에서는 폭력적인 그들이 애초 예삿사람들이 아니었다고 꼬리를 내리지만, <마파도>에서 그들을 포획한 할머니들의 힘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통찰력이며, 이는 본래 시골 고유의 것이었음을 번복하지 않는다. <마파도>는 타자를 대상화하고(범주1), 자기화하며(범주2), 고립된 자아에 머물러 있는(범주3) ‘자기-동일시’의 철학에서 벗어나 있다. “내 눈을 똑똑히 보라”던 진안댁의 간담 서늘한 눈빛은 레비나스가 역설한 ‘인간의 얼굴을 향한 윤리, 마주보는 만남의 윤리’를 촉구하는 듯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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