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의 주인공 상환에게 준엄한 링의 율법을 가르치는 첫 번째 선생은 바로 권록이다. 막싸움 중 상환에게 물려 귀가 찢겨나가는 그가 스파링에서 입을 앙다물고 농락하듯 날리는 원투펀치는 독기어린 화살이 되어 상대의 몸을 파고든다. 권투부의 터줏대감 권록이 스크린이라는 링에서 내려서면 그는 1970년생 배우 김수현이다. 극중에서는 상환과 맞서지만 실상 그의 이력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강태식을 닮았다.
그는 배우였던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엔터테인먼트쪽으로는 절대 안 간다”고 늘 다짐했다. 그러나 유전자의 작용인지 몰라도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택한다. 연출 전공의 그는 “좋은 감독이 되려면 연기를 알아야 한다”는 친구의 유혹에 빠져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3편의 대학로 연극으로 시작된 그의 발걸음은 과거 씨네2000(이춘연, 유인택 공동대표)에서 씨네아카데미 1기라는 이름으로 전속배우를 발탁할 때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우가 영화계에서 물러나며 이 제도는 2기를 끝으로 유명무실화되고 발탁된 배우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 박찬욱 감독의 <3인조>에 주연으로 합류할 기회가 잡힐 듯하다가 그를 지나쳐버린다. 이때 그에게 “연기를 그만둘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든 사건이 터진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연극 <일출>의 공연에서 그는 무대의 공포를 뼛속 깊이 절감한다. 뼈대밖에 없는 표현주의 세트. 한번 출연하면 무려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관객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은 그를 절망 속으로 밀어넣는다. 출연진 중 막내였던 그에게 공연 뒤 봇물처럼 후회가 밀려든 것은 당연한 결과.
그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애니메이션, 주위 친구들의 시나리오 작업에 곁눈질하던 그에게 어느 날 류승완 감독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 그 순간, 지금도 김수현을 보면 사람들이 탄식하며 “그 사람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적역이 찾아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하얀 얼굴 위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던 현수. 주인공 성빈에게 살해당한 뒤 밤마다 악몽을 선사하는 현수는 김수현의 연기행로를 바꿔놓는다. 그는 <다찌마와 Lee>를 제외한 류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며 한 계단씩 밟아나갔다. 그중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살찐 얼굴로 전도연을 유혹하며 느물거리는 연기는 백미. 그는 “언젠가 내가 온전한 한명의 배우가 된다면 아마도 그 몫의 반은 류 감독의 것”이라고 말한다. 화답이라도 하듯 “당신 옆에는 누군가 있어야 한다”라며 그에게 현 소속사를 소개한 것도 류 감독. <주먹이 운다>에서 서른다섯의 얼굴로 소년을 연기한 배우 김수현, 닉 놀테를 꿈꾸는 그의 오랜 여정은 드디어 영화의 바다에 닻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