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펑크멘터리의 사부, <사운드 오브 뮤직>
2001-07-11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손을 잡고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다. 영화광이었던 형 덕분에 이미 집에서 LP ‘빽판’을 통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거의 외다시피했던 나는 익숙했던 노래들과 어우러져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상들이 꿈을 꾸듯 느껴졌다. 중학교 시절 학교 단체관람으로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영화 속에 숨어 있던 사랑, 미움, 전쟁 등의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대인지라 친구들과 함께이거나 때로는 혼자서 서울 시내 동시상영관을 전전하며 잡식성으로 영화를 즐겼다. 동시상영관에서 가끔씩 했던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이벤트는 더욱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내 또래 영화를 즐겨보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한국영화는 “시시하다”하여 잘 보지 않았다. 내가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한 80년대 중반부터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88년에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를 보게 되면서 한국영화에 ‘꽂히기’ 시작했다. 어찌어찌하여 시사회를 본 뒤 혼자 다섯번인가 극장에 가서 보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괜히 센티멘털해져서 소주를 까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극중 칠수와 만수의 모습이 하루하루를 때워가며 살고 있는 그 당시 나를 보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칠수와 만수> 이후 외국영화보다 한국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고 특히 박광수 감독의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엑스트라 역으로 3살난 우리 아들이 전격 캐스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직장만 아니면 나도 그 섬에 가고 싶은데…. 며칠을 고민하다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 라는 명목으로 무작정 ‘그 섬’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완도로, 완도에서 한번은 여객선으로, 한번은 혼자 통통배로, 배를 두번 타고 그 섬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마중을 나온 사람은 없었지만, 3박4일 여정의 그 섬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영화인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고 나의 직업을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토목기사였던 나는 직장 생활에 흥미를 못 느꼈고, 결국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94년에 ‘드럭’을 오픈하게 되었다. 음악하는 친구들과 생활을 하다보니 초등학교 때 보았던 <사운드 오브 뮤직>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고, 언젠가 여건이 허락되면 음악영화를 한번 제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지지난해부터 형편이 펴서 슬슬 나의 잠재된 작업에 대한 욕구는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결국 크라잉너트를 주연으로 하는 디지털영화의 제작에 들어갔다. 스탭은 단 세명. 감독, 촬영, 나…. 이렇게 시작한 ‘펑크멘터리’ 는 촬영 2개월 만에 ‘빵꾸’가 나버렸다. 크라잉너트와 나의 무모함도 영화에서는 안 먹힌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금도 사실 크라잉너트의 멤버 중 한명이 말했던 “필름이 아깝다”라는 제목으로 나중에 써먹으려고 2개월 동안 찍었던 필름을 잘 보관하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해 강론 감독이 이끄는 ‘몽골 몽골’이라는 다국적 예술가 집단을 만나 <이소룡을 찾아랏!>이란 제목으로 크라잉너트의 영화를 다시 찍게 되었다. <이소룡을 찾아랏!>은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타이틀로 지난 6월9일 크라잉너트의 콘서트와 함께 시사회를 마쳤고 부천영화제 월드 판타스틱 부문에 선정되어 영화 마니아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 내 호칭은 대표님이 아니라 ‘단장님’이었다. 영화, 음악, 연극, 마임, 무용, 미술, 사진, 분장, 무술지도까지 각 분야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이니까 영락없는 서커스 유랑단 같은 분위기여서 그렇게 불렸다. 드럭 애들은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많이 승격되었다.

크라잉너트의 스케줄을 피해가면서 스탭들과 배우들이 “헤쳐 모여”를 반복하며 4개월간 강행군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정신없이 진행되는 작업이었지만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매일 연속된 뒤풀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서로 자화자찬하며 “오늘 죽였어”하며 기울이는 술잔은 현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다음 작업에 좀더 충실해보자는 결의로 이어져갔다. 유일한 제작부였던 나는 따로 결재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었기에 먹는 돈에 대해서 그 순간만큼은 골치를 앓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영화촬영을 끝내고 작업한 크라잉너트 3집 음반 <하수연가>에는 영화적인 냄새가 많이 묻어 있다. 요즘 감독과 크라잉너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독은 영화를 음악처럼, 크라잉너트는 음악을 영화처럼 작업한 것 같다고 한다.

크라잉너트와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서 열정으로 살아가는 각 장르의 예술가들과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많은 스탭들을 만났다. 관객과 무대가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항상 배가 고파도 부른 것 같고, 내일이 없어도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은 술이 있으니까….

이석문/ 홍익대 앞 록클럽 ‘드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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