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카사블랑카> 험브리 보가트
2005-04-19
젊은날, 나의 초상이여
<카사블랑카>의 험브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기억이 담긴 머릿속 다락방을 여는 열쇠는 참으로 다양하다. 소리, 냄새, 하찮은 물건, 거리, 사람…….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 기억 뭉치들은 다락방 문이 한번 열릴 때마다 용케도 한 줄기씩 잘도 뽑혀 나온다. 어디선가 오스트리아 작곡가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흘러나오면 난 금세 학창시절로 돌아가 체육복을 입고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운동장을 행진하고 있다. 교복을 입고 까르륵대는 여학생들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여학교 시절 내 친구 이름을 부를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청년을 보고서는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놀라 가슴이 쿵쾅, 뛴 적도 있다. 모습이 누구랑 닮았구나, 라고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세월을 건너뛰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기억이 튀어나올 때는 그처럼 순식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의식 자체는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인지 모르겠다.

영화. 영화 역시 기억의 다락방을 여는 열쇠로서는 독보적이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하던 대학시절, 난 <카사블랑카>를 주말의 명화 극장에서 만났다. 무뚝뚝하고 냉소적이지만 가슴에 뜨거움을 간직한 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닮아 있었다. 릭의 표정, 릭의 몸짓, 두 눈을 지그시 찡그리며 담배를 빨아대던 모습까지 딱 그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착각 속에서 넋을 잃고 영화에 빠져 들었다. 기숙사에서 함께 영화를 보았던 몇몇 친구들은 그 후 한동안 영화 속 노랫말과 대화를 흉내 내며 깔깔 웃곤 했다. 릭의 술집에서 일하는 피아노 연주자 샘이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 가사, “키스는 키스이고 한숨은 한숨일 뿐. 세월이 지나도 그 두 가지는 남습니다”는 “방학은 방학이고 F학점은 F학점일 뿐. 세월이 지나도 그 두 가지는 남는다” 등으로 바뀌었다. 일리자(잉그리드 버그만)와 릭이 나누던 달콤한 대화, “어젯밤에 어디 있었죠?” “그렇게 먼 과거는 기억 못해.” “오늘 밤 당신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게 먼 미래는 알 수 없어.”는 “너 어젯밤 누구랑 술 마셨어?” “그렇게 먼 과거는 기억 못해.” “수업 끝나면 뭐 할 거야?” “그렇게 먼 미래는 알 수 없어.” 등의 말을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강맑실/사계절출판사 대표

그러나 정작 내가 이 영화에 깊이 빠진 건 그 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던 막막한 상황에서였다. 이 시대, 우리의 해맑은 사랑이 세속적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겠다는 용감한 맘까지 먹고 있던 때였다. 주말의 극장에서 다시 만난 험프리 보가트는 처음 내가 보았던 낭만적 인물에서 벗어나 사랑의 고통에 번뇌하는 실존의 인물로 다가왔다. 우연히 만난 옛 연인 일리자는 이미 반나치의 리더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고, 더군다나 일리자는 두 사람의 탈출을 도와 달라며 릭에게 매달리는데, 그때 릭이 받았을 고통은 바로 나의 고통이기도 했다. 결국 일리자의 사랑을 붙잡아두는 걸 포기한 채 두 사람의 탈출을 성공시키고, 카사블랑카의 비행장에 홀로 서 있던 릭의 쓸쓸하지만 담담한 모습은 늘 내 맘 속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이다.

<카사블랑카>라는 영화는 이처럼 젊은 날 심하게 앓았던 사랑의 고통 속으로 금방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험프리 보가트의 고뇌에 찬 표정이 곧 나의 표정과 오버랩된다. 그는 곧 나였던 것이다. 이제는 사랑의 촉수가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져가는 중년의 나이, 가끔 어떤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젊은 날의 한 장면으로 내가 뛰어 들어갈 수 있다면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팠던 사랑의 고통이라면, 더욱더.
강맑실/사계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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