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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 신화의 복음서, <주먹이 운다>
2005-04-20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보수적 가족주의에 대한 향수 어린 영화 <주먹이 운다>

아무래도 한국 남성에게는 재기전이 필요하다. 경제위기가 불러온 가부장의 실패를 한방에 만회할 재기전이 필요하다. <주먹이 운다>는 ‘칙칙한’ 과거에서 벗어나 ‘신인왕’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한국 남성의 욕망을 담은 영화적 재기전이다. 남성들은 다시 가족의 ‘왕’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윗몸을 일으키고, 피를 흘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죄사함을 받는다.

<주먹이 운다>는 21세기 서두부터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남성 재기전 시리즈의 2005년 봄시즌이다. 시리즈의 배경은 과거의 무대를 벗어나 오늘의 현실로 옮겨왔다. 이제는 직설법이다. 사업에 실패한 중년도 재기해야 하고, 범죄의 나락에 떨어졌던 청년도 일어서야 한다. 물론 시절이 시절인 만큼 예전의 영화를 온전히 되찾기는 어렵다. 감히 ‘세계 챔피언’은 꿈꾸지 못하지만, ‘신인왕’은 욕심낼 만한 현실이다. 한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부장의 권위가 추락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가부장의 권위는 ‘그래도’ 다시 기댈 언덕으로 떠올랐다. 가부장제를 의심했던 가족조차 가부장제의 향수에 시달린다. 가부장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려 한다. 우리가 길들여진 가부장적 심정은 그토록 도저하다. <주먹이 운다>를 보면서 우리는 또다시 가부장제의 주술에 걸린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용산역 광장에서 마이크에 대고 “짐진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영화 초반에 인간 샌드백 강태식이 “울분에 가득 찬 모든 이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외치자 <주먹이 운다>가 꼭 종교영화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이 온몸으로 고된 시련의 과정을 겪어내고, 가혹한 시련에서 뼈아픈 깨달음을 얻고, 우리는 남자들의 죄를 사하여 주고, 마침내 남자들을 다시 우리의 믿음직한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종교영화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울분에 가득 찬 이들이여, 내게로 오라”는 대사는 “세상에 대한 울분에 가득 찬 관객이여, <주먹이 운다>를 보라”는 뜻으로도 이해됐다. <주먹이 운다>에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빠(혹은 아들) 힘내세요, 우리가 믿잖아요

권투라는 80년대 복고, 피칠갑하는 남성 신파,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는 가족주의까지, <주먹이 운다>는 최근 한국영화의 흥행 코드를 빠지지 않고 담고 있다. 잘 팔리는 재료들을 골고루 담아 만든 감동의 종합선물세트다. 그 재료들에 색다른 조미료도 첨가하지 않았다. 되도록 익숙한 방식으로 요리한다. 그래서 적당히 입맛에 맞지만, 강렬한 뒷맛을 남기지는 않는다. 볼 때는 눈물겹지만, 금방 잊혀진다. 일단 불행의 레퍼토리가 뻔하다. 불효자의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설마 할머니까지 아프지는 않겠지 하는 순간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있다. 실패한 가부장의 아들은 아버지를 외면하고, 아내는 남편을 버린다. 그 모든 것들은 너무나 통속적이지만(혹은 통속적이어서) 너무나 간절한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통속적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통속적’이라는 고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영화는 그저 마지막 감동 한방을 위해 관객을 정신없이 코너로 몰고 간다.

강태식의 캐릭터는 한때 사랑받다가 이제는 버림받은 자들을 겹쳐 만든다. 왕년의 권투선수나 실패한 가부장이나 버림받긴 마찬가지다. 먹고살 만해진 국민이 맞으면서 싸우던 권투선수를 잊었고, 생활고를 겪는 가족은 돈 못 버는 가부장을 원망한다. 이중의 실패는 강태식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권투선수 강태식이 “우리 국민들이 정말 우리한테 이러면 안 돼”라고 말할 때 “가족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돼”라는 가부장의 하소연이 겹쳐진다. 소년원의 류상환(류승완)은 지극한 사랑을 받지만 지독한 실망으로 돌려주는 인물이다. 상환의 불행도 너무나 익숙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거듭된 불행은 신문 사회면의 상투적 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양아치 어법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몇몇 대사는 새롭지 않다. “빠나마의 홍수환”이나 “88올림픽의 김광선”은 이제 닳고닳은 관용어구처럼 들린다. 상환이 자신을 괴롭히는 소년원 동기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에서는 타이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먹이 운다>는 지나치게 불행을 설득하려 한다. 강태식의 불행을 묵묵히 지켜보는 국숫집 주인 상철(천호진)의 한마디는 역설적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상철은 희망을 잃고 술주정 부리는 강태식에게 “야 강태식,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뿐이 아냐”라고 쏘아붙인다. 누군가는 이 말이야말로 <주먹이 운다>에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고 일갈했다. 우리는 모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영화를 자기 이야기로 느끼고 눈물 흘린다. 우리는 또한 모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영화의 아름다운 결말에 허탈하기도 하다. 그 모든 흥행 코드들을 모아놓았으니 감독이 ‘웰메이드’ 하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다. 영화는 웰메이드됐고, 관객을 울게 한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면서 아쉬움은 커진다. 류승완 없는 류승완 영화였음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주먹이 운다>에는 비주류의 재기는 휘발되고 주류의 욕망이 남아 있다. 블록버스터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렬하다.

<주먹이 운다>는 짐작할 만한 결말로 끝난다. 지독한 시련에 증폭되던 갈등은 손쉽게 봉합된다. 두 주인공의 가족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링 주변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영화의 출연진 일동은 신인왕전이 중계되는 텔레비전 앞에서 응원에 열을 올린다. 강태식의 ‘프레셔스’인 은메달을 빼앗아갔던 피도 눈물도 없는 조폭도, 류상환을 끝까지 ‘갈구던’ 소년원생들도 옹기종기 모여앉아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마음을 졸인다. 모든 갈등은 봉합되고, 순식간에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두명의 신인왕이 탄생한다. 승패가 갈라놓을 수 없는. 신인왕전의 진정한 심판이었던 강태식의 아들과 류상환의 할머니는 돌아온 탕아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아들은 “아빠가 뭐가 미안해”를 울부짖으면서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할머니는 ‘모큐슈라’의 한국어 번역어인 “내 새끼”를 되뇌면서 손자를 감싸안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사함을 받고 가족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온다.

추신.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주먹이 운다>는 우연히 권투를 소재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소재는 같지만 영화의 선택은 다르다. 아웃사이더 출신 한국 감독은 전통가족을 복원하고, 메이저 출신 미국 감독은 일종의 대안가족을 선택한다. 아이러니한 선택이다. 역시 현실은 무섭다. 가족의 위기가 오래된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감독조차 (생각이 있다면) 진보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가족이 아직 신화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는 ‘과격하지’ 않으면 전통적인 결말 너머의 상상력은 갖기 힘들다. 현실은 상상력을 잠식한다. 그래도 아쉽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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