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주먹이 운다>는 그의 전작 <아라한 장풍대작전>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하는 영화였다. 두 영화를 전적으로 지지하진 않지만, 한국 땅에 태어나 소년기에 자신을 매혹시킨 어떤 장르를 붙들고 그 장르의 매혹을 보존하면서 오늘의 관객과 만나려는 젊은 감독의 고집과 고민이 그 영화들에서 짙게 느껴졌다. 그의 고집과 고민이라고 내가 느끼는 것이 정확히 그의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이야깃거리는 될 거라는 짐작으로 이 글을 쓴다.
승리 아닌 피흘림을 위한 권투
<주먹이 운다>의 대단원은 최민식과 류승범의 피투성이 권투 시합이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제대로 싸우는 것이다. 제대로 싸움으로써, 류승범은 할머니로부터, 최민식은 아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는 것이다. 류승범이 판정승을 거두지만 제대로 싸웠으므로 둘 다 승리한다. 할머니와 아들은 감격적 포옹으로 그들의 승리를 확인한다.
그들의 대결을 보면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저들은 어디서 싸우고 있는 걸까. 혹은 왜 권투로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으려 하는 걸까. 40대 관객인 나에게조차 링은 과거의 공간인데, 아마 20대 관객에게라면 거의 현실감이 없을 텐데, 주인공들은 왜 저곳에 이르렀을까. 혹은 감독은 왜 주인공들을 저 무대로 이끌었을까.
<록키>와 <챔프>와 <분노의 주먹>이 만들어졌을 때, 링은 동시대적인 공간이었다. 그때, 링은 빛나는 무대였지만, 권투의 영광은 차츰 사라졌고 오늘의 프로 복싱은 우리의 시야 밖에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주먹이 운다>는 오늘의 이야기인데도, 두 사내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소는 그래서 가상공간처럼 느껴진다.
다시 물어보자. 류승완 감독은 왜 권투를 소재로 택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복싱을 많이 보지는 않는다. 다만 개인적으로 복싱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도 전직 복서를 등장시켰다. 복싱은 최소한의 장비를 사용하는 스포츠로서 아주 단순한 룰과 테크닉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함을 끝없이 반복해야 링에 오를 수 있다.” 그는 “격투기 대결을 택하려 했으나 최민식이 난색을 표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기서 한 가지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에게(그리고 감독에게) 중요한 건 권투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복서로서의 그러니까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일반 관객으로서의 나는 두 주인공이 권투를 얼마나 잘하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20세기 최고의 권투시합이라 부를 만한 1974년 알리와 포먼의 킨샤샤 대결에서 알리가 얼마나 위대한 복싱 전술을 펼쳤는지는 전문가들에 의해 사후에야 밝혀졌다.
왜 류승완은 피학의 완성에 몰두하는가
보통의 스포츠영화에서 주인공의 전문가로서의 자질은 온전히 보여지는 게 아니라 극중 전문가에 의해 판단되고 보증된 뒤 강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확정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힐러리 스왱크의 복서로서의 자질은 뛰어난 트레이너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보증됨으로써 관객인 우리는 그것을 믿게 된다. 권투의 시학이라 부를 만큼 섬세하고 문학적인 권투론이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전달되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권투 자체에 대한 매혹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주먹이 운다>에는 그런 장치가 없다. 두 주인공의 트레이너인 변희봉과 임원희도 아마추어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매혹적인 스포츠로서의 권투가 아니라, 그것의 어떤 효과다. 두 주인공은 복서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투성이가 되기 위해 링에 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피흘림이다. 극중 관객인 할머니와 아들은, 그리고 이 영화의 관객인 나는 두 주인공이 쓰러지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 이후에야 이들을 승인한다. 권투이건 격투기이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풋내기 복서 록키는 세계챔피언과 맞붙어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승리자가 된다. <주먹이 운다>의 두 주인공은 이겨봤자 서로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증할 수 없는 하류인생들이다. ‘신인왕’이라는 핑계가 있긴 해도, 그 타이틀은 오늘의 관객에게 실감되는 무게가 거의 없다. 그들은 대결한다기보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의 억쇠와 득보처럼 대결이란 이름 아래 서로의 피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의문이 생겨난다. 왜 류승완은 승리가 아니라 피학의 완성에 몰두하는가. 이것을 이른바 ‘한’과 ‘신파’에 관한 한국 문화의 고유성과 연관시키는 논의는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신파를 “패배만 거듭하는 한국 서민의 변형된 저항의 형태이며, 마조히즘에 의한 자기 해방의 수단”이라고 본 이영일의 통찰을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류승완이 젊은 감독들 중에서 유난히 70, 80년대 한국영화에 애정이 깊다는 점도 이런 논의의 유용성의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너무 방대한 논의며, 개인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 여기선 범위를 좁혀 액션키드로서의 류승완의 곤경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려 한다. 류승완의 곤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능력의 곤경이 아니라 조건의 곤경이다. 그 곤경은 <옹박>에 관한 졸고(<씨네21> 481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문화 속에 액션의 아이콘으로 전용할 만한 민속적 도상들이 보존돼 있지 않다는 데 기인한다. 그 도상들은 생활세계에서 추방됨으로써, 액션영웅의 현실적 모델이 사라진 것이다.
<옹박>의 무에타이 청년 토니 자는 눈부신 권법을 구사하며 마피아를 제압하고 불상을 되찾아왔다. 하지만 태권동자 마루치를 영화적 현실로 불러온다 한들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 혹은 파란해골 13호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조폭영화가 한때 붐을 이뤘지만, 동시대 한국의 조폭에게서 반영웅의 아우라를 찾는다는 건 난감한 일이다. 영화와 TV에서 김두한이 30여년 동안 수없이 불려나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영웅의 주먹이 운다
사견으로는 류승완의 세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의 감춰진 주제는,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힘은 키웠는데 쓸 데가(혹은 쓸 수가) 없다’이다. 그러니 ‘주먹이 운다’(이 제목은 류승완의 영화세계를 압축하는 절묘한 문장이다). 이것을 액션키드인 류승완 감독의 입장으로 번안하면, ‘액션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적 수련을 했는데 만들 액션이 없다’이다.
물론 이건 과장이다. 그는 자신의 세 장편을 모두 액션영화 혹은 액션이 가미된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엔 그의 곤경이 새겨져 있다. 류승완은 장르의 시간 안에 자신을 가두는 타란티노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액션영웅이 불가능한 누추한 현실을 응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액션영웅을 버릴 수 없다(“복싱을 잘 보지 않지만, 복싱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로 들린다). 그 딜레마가 리얼리즘 드라마와 액션 장르의 기묘한 동거 혹은 부정교합으로 나타난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전직 복서 정재영은 결국 도태되는 악당이며 이혜영과 전도연이 진짜 주인공이다. 그런데도 정재영과 또 다른 악당인 정두홍과의 투견장 격투장면이 대단원에 배치돼 있다. 게다가 10여분이라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 이 장면에 할애된다. 이 시퀀스는 표현강도에서나 길이에서나 구성의 결함처럼 보인다. 반영웅의 아우라를 살리려면 영화는 그의 소멸로 종결돼야 하며, 그의 최후의 상대는 영웅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은 고단한 ‘현실’을 사는 여인들이다. 그러니 정재영의 주먹이 운다. 그는 소멸해야 할 쓸모없는 존재지만, 불운하게도 액션의 캐릭터다. 감독은 이 나쁘고 사랑스런 캐릭터에게 내러티브상으로는 불필요한 시간을 마련해 소멸의 장르적 의식을 치러준다. 현실의 시간에서 장르의 시간으로 옮겨간 이 의식이 끝나자 그는 피투성이가 돼 소멸한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류승완은 드디어 온전한 액션영웅을 찾았다. 도인 7선. 그러나 류승완은 순수한 장르적 캐릭터로 밀고갈 만한 인물을 찾고도 이들을 오늘의 액션영웅으로 곧바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도인들은 가능한 한 속세 일에 개입하는 걸 금한다. 도인들의 주먹도 운다. 그래서 매개자로 등장한 인물이 평범한 현실의 경찰 류승범이다. 도인들에게 도술을 불완전하게 전수받은 그는 엉겁결에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도술은 결함투성이다. 세상 밖에 머물러야 하는 도인들의 계율, 그리고 전수의 불완전성과 결함은 액션영웅의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한 감독의 자의식의 반영이다.
이 점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류승범은 창고에서 도인 안성기를 찾다가 어디선가 울려나오는 그의 웅장한 목소리를 듣고 “방송실에 계신가요?”라고 질문한다. 그는 도술을 기계장치의 효과로 오인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오인하지 않았다. 이 영화 속의 도술은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만들어낸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류승범의 질문은 관객의 질문으로 이렇게 번역된다. “온전한 액션영웅은 영화라는 기계장치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 건가요?”
장르 유희 vs 딜레마의 극한, 그 선택의 갈래
<주먹이 운다>도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구성의 난조가 있다. 이 영화의 대단원에선 권투 소재의 영화로는 유례없이 6라운드가 전부 진열된다. 김소영의 지적대로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사정 보지 않는 삶의 냉혹함”을 이미 전시한 뒤여서 이 마지막 승부는 구성의 묘라는 점에서 동의하기 힘들다. 류승범의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서 압사하고, 최민식은 조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극단적 절망과 비극이 상연된 다음의 대결치고는 너무 장황하다는 것이다.
<주먹이 운다>의 대결이 <피도 눈물도 없이>의 대결과 표면상 다른 점은 영웅(반영웅)이 살아서 웃는다는 것이다. 다른 점 또 하나는 전자의 대결이, 오직 생존 본능과 무제한의 폭력이 지배하는 투견장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 제도에 편입돼 게임의 룰을 수용하는 합법적 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그 차이만큼 <주먹이 운다>는 장르의 시간에서 현실의 시간으로 이동한 셈이다. 그러나 링이라는 유사 회고적 공간과 이상할 만큼 긴 대결의 시간과 그리고 두 주인공의 피흘림에는 액션영웅에 대한 류승완의 집착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앞서 제기한 질문. 왜 류승완은 승리가 아니라 피학에 몰두하는가. <주먹이 운다>에서 두 주인공의 피학의 유대는 액션영웅 되기에 실패한 혹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자각한(그래서 주먹이 우는) 자의 자기 학대이며, 현실의 시간으로 이행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제의처럼 보인다. 피흘리고 나서 (장르적으로 죽지 않고) 그들은 웃는다. 류승완은 그것을 “영화보다 사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표현했다.
짐작건대 류승완의 길을 도식화하면 세 가지다. 하나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장르쪽으로 더 진전시켜 장르 유희의 길로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먹이 운다>를 넘어 삶의 애환을 녹여내는 전통적 서사에 다가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에서의 딜레마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길이 가장 궁금하며 보고 싶다.
<황토기>에서 장사로 태어난 억쇠는 장사는 불효하고 역적이 된다는 속설에 짓눌려 폐인으로 살아간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 중인 또 다른 장사 득보를 만나 억쇠는 비로소 죽음 같은 삶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득보의 단도 날이 가슴 한복판을 푹 찔러, 이 미칠 듯이 저리고 근지러운 간과 허파를 송두리째 긁어내준다면” 하고 상상하며 득보와의 죽음에 이르는 싸움에 나선다. <주먹이 운다>는 20여년 전에 읽은 이 소설을 상기시켰지만, 그것의 심원한 비극성에 이르기 전에 화해하고 웃는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선 류승완의 곤경이 더 깊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