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깨달음 없는 오이디푸스의 여정, <달콤한 인생>
2005-05-04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모호한 무드의 유혹

<달콤한 인생>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드보이> 방식을 따라 “폼생폼사”라는 사자성어가 쓰인 종이를 누구에겐가 쳐들어 보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 길로는 가지 않기로 하자. 차라리 이 영화에 담긴 어떤 유혹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그것을 말로 해야 하는 이유는, 영화 전체를 추동하는 애매함, 모호성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달콤한 인생’이고 , 극장판에 뜨는 영어 제목은 달콤 씁쓸한(BITTERSWEET) 인생이며, 영화의 상징적 무대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는 <라 돌체 비타>(달콤한 인생)다. 이 영화엔 인생의 달콤한 장면이 거의 전무하니 제목은 분명 역설, 그러나 동시에 그 역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달콤함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씁쓸한 인생의 장들이 스크린에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번 보아도 인생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달콤해 그의 상실이 또 그토록 쓰라린 것인지 그 아이러니와 역설이 이해되지 않는다. ‘몰락’ 이전부터 선우(이병헌)는 영화 마지막의 대사를 미리 끌어와 말하자면 보스를 위해 ‘개’처럼 살고 있었다. 그래도 종내 달콤한 부분을 유추하자면 사람을 죽인 뒤 설탕이 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보스의 젊은 연인의 배신 가능성을 경청하며 그와 전복을 나눠 먹고, 좋은 양복을 입고 해결사 노릇을 하는 것 등등일 것이다. 한 인간의 몰락을 끔찍하게 느끼게 하는 권력의 단맛, 매혹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테크누아르와 액션의 조합

좀더 핵심에 근접한 ‘모호성’으로 다가가자. 선우는 수십명을 죽이고 또 자신도 죽어간다. 그러나 끝내 사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영화의 구조적 모호함의 핵이다. 선우(이병헌)는 보스(김영철)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 저한테 왜 그랬어요?” 보스는 모욕감을 느꼈다는 등의 이유를 대지만 선우가 말한다. “진짜 이유가 뭐예요?” 그러나 보스는 선우가 쏜 총에 심장을 맞고 죽기 때문에, 대답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보스를 찾기 전 선우는 백 사장(황정민)에게 또 이유를 묻는다. 백 사장은 인생은 고통이라는 둥, 이발소에 걸려 있던 푸슈킨의 시 같은 말을 지어내면서, 선우를 짧게 여러 번 찌른다. 그리고 이유를 알고 싶다면 자신을 찾아와서는 안 되지라고 충고한다. 백 사장 역시 선우 총에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에 선우는 적들로부터 종내 답을 구하지 못한다.

여하간,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는 ‘왜?’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말하자면 중세 기사의 퀘스트(quest)에 해당하는 것인데, 물론 이 영화는 중세기사담이 아니며, 그러니 그 기사담의 종교적 구조를 따라가지 않는다. 또한 선우는 자신의 아버지격인 보스(그는 조직과 가족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한다)의 여자를 욕망하고, 또 그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오이디푸스의 여정을 따라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겐 있으나 그에게는 끝내 주어지는 않는 것이 상황의 역전에 따른 지식과 깨달음이다. 오이디푸스의 무지, 또 깨달음이 동정과 공포를 일으킴에 비해, 이 영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인공 선우에 대한 동정의 기반을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감금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올드 동창생 보이들을 찾아다니는 올드보이처럼, <달콤한 인생>의 선우도 조직의 올드보이들을 찾고 오대수처럼 자신이 인간 하위의 ‘개’로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대수가 도달하게 되는 ‘근친상간’과 같은 공포에 찬 진실은 애당초 없다. 바로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영화 <달콤한 인생>이 가진 모호한 유혹이다. 예컨대 전광석화와 같은 깨달음, 그 고통스런 순간은 부재하고, 관객은 이러한 인식의 모호함 , 혹은 부재 속에서 전적으로 영화의 무드, 스타일, 톤과 같은 분위기에 매달리게 된다. 영화적 유혹에 의존하게 된다.

일단 선우의 이런 행로를 영화가 스스로의 형식으로 선언하는 필름누아르 속에서 생각해보자. 팀 덕스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필름누아르는 장르가 아니라 차라리 무드이며, 스타일이고 시점 혹은 영화의 톤이다.”(팀 덕스) 이때 무드는 멜랑콜리와 소외감, 황량함, 환멸, 모호함 그리고 도덕적 타락 등을 포함한다. 또 필름누아르는 불안과 회의 그리고 의혹이라는 전후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말도 참조하기로 하자. 대부분의 영화적 공간에서 인물들이 스탠드나 몇개의 부분 조명에 의지해 강한 빛의 콘트라스트나 어둠 속에 잠겨 있고 예의 모호함이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형식적 무드는 분명 필름누아르를 향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된 뒤 백 사장파와 싸움이 벌어지고 상대를 제압한 뒤 선우가 다시 문을 열고 호텔 복도로 나올 때의 차가운 백색이나 스카이라운지의 청녹색 부조는 이 영화에 테크누아르(Tech Noir)라고 알려진 일종의 ‘Science-Fiction’에 가까운 시각적 긴장을 부여한다. 호텔 크라운의 이러한 테크누아르적 냉담함은 나중에 선우가 처벌을 받게 되는 현장의 도살장 분위기- 인간 도륙을 위해 칼을 갈고, 튀는 피를 막으려 앞치마를 입고, 현재는 매달려 있으나 곧 시체가 될 선우의 피를 받기 위해 함지박을 댄다- 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선우는 매끈한 외장의 테크누아르 장르의 주인공에서 액션 장르의 주연으로 ‘몰락’한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테크누아르와 액션이 긴급히 만나게 됨으로써, 사실은 크라운 호텔과 인간 도살장이 쌍둥이 공간이며 양자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한다. 호텔에 중심으로 정치적 모략과 러시아와 동남 아시아계 이주인들의 성매매,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그 유지를 위해 외부에서는 인간 도륙이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 이 두축은 <라 돌체 비타>에서 전격적으로 만난다.

강렬한 애매함은 유혹적이다

테크누아르풍 이후엔 무덤파기(<조용한 가족>보다는 덜 분주한), 불막대기 휘두르기, 총싸움 등 영화는 그야말로 유사 슬래셔를 거쳐 액션 장르로 달려간다. 이 질주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없다. 팜므파탈 역으로는 믿을 수 없게도 줄무늬 박스 팬티를 입고 연인과의 정사를 준비하던 희수(신민아)는 어떤 이중 플롯도 꾸며내지 않으며, 보스나 적 진영의 배신의 플롯도 없다 .반전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상황의 역전에 따르는 인식 혹은 깨달음 없이 고통스런 마지막 장면을 준비한다. 마지막 장면은 허문영 평론가가 전영객잔 1호, <주먹이 운다>에서 지적하는 피투성이 피학성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암울한 시대의 지배를 받는 주체의 분열를 다루곤 하는 누아르적 무드가 피바다 액션으로 변할 때, 그리고 선우의 예의 질문 “저한테 왜 그랬어요?”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사실은 “아버지,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아직 성년의 문턱에 있는 미성년 누아르/액션의 주인공을 발견한다. 선우는 반항하나 이유를 모른 채 죽고 죽이는 것이며, 그래서 실질적 나이와 관계없이 ‘이유없는 반항’을 하는 십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랑도 섹스도 해보지 않은 미성년처럼 그려진다. 또한 그가 상상하는 아버지 역시 그 이유를 가르쳐줄 수 없는, 젊은 여자와의 관계에 실패한 나이만 먹은 남자인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총질해 몸의 여기저기에 깊은 구멍이 생기지만, 두 사람 누구도 삶의 깊은 이해를 구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에 여전히 어떤 모호한 유혹적 시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신비한 소녀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은 미소년의 욕망이 상대를 찾지 못한 채 나르시시즘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우는 죽음의 순간, 주마등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거기서 희수는 그를 응시한다. 희수의 선우에 대한 응시의 내용은 물론 모호하다. 그 모호함이 불러일으키는 떨림과 호기심, 유혹을 다시 한번 영화의 핵으로 불러오며 <달콤한 인생>은 그 모호한 생을 마감한다. 유혹은 사실 강렬한 애매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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