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혈의 누> 범인은 ○○○! 영화계 골칫거리 ‘스포일러’
2005-05-06
글 : 서정민 (한겨레 기자)

※이 글에는 ‘철지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spoiler). 망치는 사람, 흥을 깨는 사람 등을 일컫는 영어 단어다. 영화판에선 ‘영화의 결말이나 반전에 관한 정보를 미리 흘려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깨는 사람 또는 글’을 뜻하는 말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기자가 최근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바로 “<혈의 누> 범인이 ○○○가 맞냐?”는 것이다. 인터넷을 뒤적이다 우연히 “범인은 ○○○”라는 덧글을 봤단다. 물어보면서 반드시 덧붙이는 말도 있다. “범인은 얘기하지 말고 덧글이 맞는지 안맞는지만 알려줘.” 사실이 아니라는 답변을 들으면 이미 밟아버린 지뢰의 피해를 원상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여기에는 “글쎄…”라며 어물쩡 넘기는 게 상책이다.

지난 4일 개봉한 <혈의 누>와 관련한 스포일러가, 범인을 포함한 영화 내용이 미리 알려지길 꺼린 제작사가 예외적으로 언론·배급시사회만 하고 일반시사회를 하지 않았음에도 개봉 몇주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스포일러 덧글들은 원 게시물과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네티즌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작사인 ㈜좋은영화 관계자는 “영화를 보지 않고 지어낸 루머성 글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와전된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낯선 지하실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깨어난 두 남자가 얼굴 없는 범인의 지령에 따라 불가능한 탈출을 시도한다는 줄거리의 스릴러물 <쏘우> 역시 스포일러로 골치 아파했다. 영화 홍보를 맡았던 올댓시네마 관계자는 “2001년 <디 아더스>를 개봉했을 때만 해도 지킬 건 지키자는 인식이 관객들 사이에 있었는데, 올해 <쏘우> 때는 그런 것마저 무너진 것 같았다”며 “이런 상황에서 반전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국내 스포일러의 역사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개봉된 19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극장 앞에 줄지은 무리를 향해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치고 도망가거나 영화 포스터 속 범인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치는 등 고전적인 방법은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식스 센스> 때는 한 일간지에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는 스포일러가 퍼지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는 웃지 못할 스포일러성 기사가 실렸다.

<올드 보이>의 경우 스포일러의 폐해를 막기 위해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을 따로 운영하는 묘안을 짜내기도 했다. 영화와 관련된 퀴즈를 던져 이를 맞춘, 다시 말해 영화를 본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 영화를 안본 사람이 느닷없이 스포일러를 만날 기회를 차단했다. 그래도 “근친상간을 다뤄…”라는 한 일간지 제목에 무너지긴 했지만.

스포일러의 심리로 볼 때, 스포일러를 너무 싫어하면 되레 스포일러들을 부추길 수도 있다. 어쩌면 한 네티즌의 말처럼 스포일러에 너무 민감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잘 만든 영화는 결말을 알고 봐도 재밌더라구요.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는 결말을 알고 보면, 모르고 볼 때 결말을 추리하느라 눈여겨 보지 못했던 영화의 세부장치들을 보게 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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