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는 눈이 크다’라는 말은 ‘김혜수의 성은 김이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20년 가까이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그저 당연할 뿐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분홍신>(청년필름 제작)의 촬영현장에서 카메라 앞에서 선 그의 눈이 진짜 커 보였다. 4일 마포의 한 오피스텔 복도에서 진행된 촬영에서 김혜수는 자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딸을 찾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불안과 공포로 흔들리는 눈망울에 온 몸의 신경이 모두 모여버린 듯 그의 눈은 크게 떨고 있었다.
<와니와 준하>를 만들었던 김용균 감독의 두번째 연출작인 <분홍신>은 분홍신을 신고 끝없이 춤을 추다가 스스로 발목을 자른 소녀의 이야기인 안델센의 동화를 모티브로 가져온 공포영화다. 18년째 연기를 해왔고 중편 <메모리스>에서 으스스한 연기를 한 적이 있지만 본격 공포연기는 처음이다. “공포영화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얼굴없는 미녀>에 이어 다시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부담도 있었고. 처음에는 좀 망설였죠.” 그런데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독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이미 영화 속으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힘드네요. 집중력이나 에너지 소모가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공포물은 이야기나 화면, 연기 모두 ‘강렬한’ 장르에 속하지만 정작 김혜수가 연기한 안과의사 선재는 지금까지 했던 어떤 역보다 ‘묻히는’ 캐릭터다. “선재는 여러 사람 속에 있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예요. 내성적이고, 엄마나 아내가 아닌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면에서 스스로를 억압하는 인물이죠.” <얼굴없는 미녀> 때의 흐뜨러진 듯 풍성한 머리는 92년 출연했던 영화 <첫사랑>을 연상시키는 단정한 단발로 바뀌었고, <한강수 타령>의 밝고 화사한 옷차림도 모두 무채색으로 톤다운됐다.
<분홍신>은 공포영화지만, 여성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에게 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영화다. 그는 “지금까지 찍었던 어떤 영화보다도 같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 묘한 감정의 기류나 충돌같은 데 예민하잖아요. 단순한 질투나 미움 같은 걸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여성의 심리를 그리는 부분에서 제 의견을 많이 냈어요. 촬영 끝내고 집에서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시도때도 없이 전화하는 통에 감독님 꽤나 피곤하셨을 걸요.” <링>이나 <검은 물 밑에서>처럼 잘 된 공포영화라 하더라도 강렬하고 긴장된 분위기에 파묻히기 쉬운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의 결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 김용균 감독이 고민하는 <분홍신>의 과제. “무서우면서 알맹이 있는 영화가 나오면 되는 거죠.” 김혜수는 큰 눈만큼이나 시원스럽게 요점을 정리했다. 막바지에 이른 <분홍신>의 촬영은 5월 중순 끝나 7월 초 관객을 찾아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