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보이지 않는 것 찾기, 행복한 체험, <스타 워즈 1:보이지 않는 위험>
1999-07-20
글 : 김혜리
비평의 법정, 피고석의 <스타워즈 에피소트1>을 위한 변론

컴퓨터를 켜고 두개의 윈도를 나란히 열어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의 미덕과 결함을 적어본다. 두 목록은 비슷한 길이로 늘어간다. 아니, 어쩌면 아쉽고 아깝고 짜증나는 항목수가 좀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4편까지 남은 30년 남짓한 시간을 세편의 에피소드로 쪼개느라 성격을 발전시킬 반경마저 비좁아진 인물들, 클라이맥스를 흐트러놓은 어눌한 편집, 무엇보다 거슬리는 인종적 편견이 스민 외계 생물들의 스케치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도도하고 위풍당당한 영화를 감히 변명(?)하고 싶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에 혹하고 만다. 실망으로 인한 코웃음이나 엄격한 비판들이 충분히 많았기에 한번쯤 우물우물 볼멘소리를 해도 해롭지 않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든 걸까. 아니면 볼 때마다- 겨우 세번이지만- 내게 새로운 재미와 아름다움을 열어준 영화가 혹평의 단칼에 죽어나가는 모습이 한 관객으로서 못내 속상해서일까.

은하계 먼곳에서 해바암을 만끽한다

팬을 참칭하기엔 한참 모자란 내게 <스타워즈> 3부작의 으뜸가는 매력은 우선 범용한 경지를 우습게 뛰어넘는 상상력의 규모와 밀도, 그리고 그것이 낳는 해방감이다. <스타워즈>는 스스로 봉인된 세계다. ‘옛날 옛적 은하계 먼곳’은 <혹성탈출>류 SF영화와 달리 인류가 사는 지구나 태양계 역사와 어떤 수직 수평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곳에서 인간과 외계생물, 안드로이드들은 상이한 언어를 쓰면서도 자연스레 소통한다. 로봇은 분명 2류 시민이지만 그렇다고 생물 캐릭터보다 결코 관객에게 정을 덜 받지는 않는다. 조지 루카스는 이 세계의 지도와 족보를 그리고 종족부터 그릇 모양까지 일일이 창조한 ‘조물주’다. <스타워즈 에피소드1 - 보이지 않는 위험>은 일단 그 창세기로서 큰 손색이 없다. 티내지 않게 깔린 복선망과 군국주의 제국 수립 이전 장인들의 시대에 걸맞은 미려한 디자인들은 감탄스럽다. 1977년 불쑥 나타나 천하를 평정한 <새로운 희망>(4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위험>은 하늘을 찌르는 기대의 누각에서 떨어지는 일만 남은 영화다. B급 영상물들의 미학을 새 지평에 펼친 <새로운 희망>의 눈이 열리는 신선함이나, 5편 <제국의 역습>(80)의 솔깃한 이야기 솜씨는 여기에 없다. 그러나 1편이 지난 3부작에 턱없이 못 미치는 졸작이라는 평들은 좀 의아스럽다.

이 십자포화의 중앙에는 ‘보잘것없는 내러티브’와 ‘지루한 화술’이 놓여 있다. 그러나 상기하자면 <스타워즈>는 예전부터 꽤나 느리고 방만한 영화였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옛 할리우드식 이야기와 구로사와 아키라 등 예술영화 감독들의 양식을 본받은 영화로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스타워즈>의 고전주의적 내러티브와 전설적 영웅의 면면과 스펙터클을 두루 보여주는 루카스의 스타일은 90년대 블록버스터들과는 사뭇 다르다. 기물이 속속 파괴되고, 피사체가 카메라와 가파르게 교차하며 관객에게 다가들고, 초고속 플롯 진행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요즘 여름영화들의 짜릿함은 <스타워즈> 시리즈에 속하지 않는다. <타이타닉>의 로맨스, <맨 인 블랙>의 유머, <아마겟돈>의 스피드가 <보이지 않는 위험>에 없다고 실망하는 일은, 네모에게 “너는 왜 동그라미가 아니냐”고 다그치는 격이 아닐까. 무미건조하고 설교투인 루카스식 대사는 확실히 한심하지만, 이것도 새로운 결점은 아니다. <스타워즈>의 대사는 처음부터 웃음거리였다. 당시 풋내기였던 해리슨 포드조차 “조지, 이런 쓰레기를 타이핑할 수는 있겠지만 차마 입으로 할 순 없죠”라고 불평했을 정도다.

캐릭터들의 인과관계, 흥미진진한 크로스퍼즐 풀기

주지하듯이 <보이지 않는 위험>은 본디 9부로 구상되고 6부로 제작될 대하드라마의 서두에 불과하다. 물론 한편의 독립된 영화로 시장에 나왔으니 홀로 상품성을 검증받는다. 하지만 스타워즈 연작은 <배트맨>이나 <람보> 시리즈와는 다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은 모티브와 주제를 제시하는 교향곡의 첫 번째 악장에 해당되며 따라서 후속 악장과의 대화 속에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제시한 “고귀한 혈통의 여성을 중심으로 악의 세력을 무찌른다”는 제1주제는 4편에서 재현된다.

<보이지 않는 위험>은 정말 둔감한 드라마다. 미래의 어둠을 감촉하기 힘든 소년 아나킨을 비롯해, 배우들은 감정을 분출할 순간을 결코 허락받지 못한다. 연작을 통해 개성과 인간미를 완성한 3부작 주인공들에 비해, 캐릭터들은 종잇장마냥 얇고 파리하다. 루카스는 정서적 감동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이미 여러 차례 전편들을 감상한 관객들에게 전적으로- 지나치게 자신만만히- 의존한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정서적 울림을 획득하는 장소는 스크린 위가 아니라 스타워즈 세상의 연대기와 평면도가 들어 있는 팬들의 머릿속이다. 매우 독특한 수용 양식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의 감정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들에 의해 발생한다. 이미 아는 캐릭터의 과거사를 만나는 정겨움과 예정된 운명을 알기에 마음을 조여오는 서스펜스와 안쓰러움. 아나킨이 엄마에게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라고 말할 때, 오비완이 임무에 불안을 느낄 때, 아나킨을 포섭할 미래의 황제 팰퍼틴의 옆모습이 의미심장하게 카메라에 잡힐 때, 감정의 파장은 커진다. 마니아들은 더 많은 암시를 찾기 위해 몇번이고 극장으로 향하고 루카스는 그들을 위해 다층적 힌트를 심어놓는다. 캐릭터들이 해설된 책이나 “하나의 진실, 하나의 미움”(다스 몰) 같은 함축된 포스터 문구들도 영화 텍스트의 외연을 비밀스럽게 확장한다. 포스의 균형은 과연 어떤 식으로 바로잡힐까. 이 맑고 순진한 소년이 어떻게 악의 심연으로 추락할까. 가려진 휘장 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운명의 모서리들로 관객의 감성과 상상력은 활성화한다.

<스타워즈> 이데올로기, 그 은밀한 전복적 코드

<스타워즈> 시리즈가 <인디아나 존스>와 더불어 미국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은 널리 제기돼왔다. 우주 진출을 꿈꾸던 케네디의 목소리나 레이건의 패권주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이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탐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백인 남성들이 제국과 전투에서 최고 수훈을 세운다는 줄거리 궤적을 이데올로기적 포석 내지 ‘음모’로 직역하는 일은 위험하거나,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아직은 백인 남성 위주로 사건이 풀리지 않는 할리우드영화를 세는 편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 조지 루카스가 창작한 미국산 오락영화인 <스타워즈> 연작은 ‘당연하게도’ 미국 백인 남성의 판타지다(아니라면 이상하다). <스타워즈>가 미국적 판타지임은 확실하지만, 잠복한 욕망과 죄의식, 보상 심리들이 영화의 몸체에 굴절, 반사되는 양상이 단순하란 법은 없다. 루크와 한 솔로, 레이아는 다양한 마이너리티 집단과 연대해, 그야말로 전원 백인으로 보이는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제국군과 게릴라식으로 싸운다(1편에서는 하수인 격 무역연합이 적군이지만 ‘아군’의 인종적 다양성은 여전하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제3세계 레지스탕스 멤버로 정체성을 갈아입고 힘센 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자기들 모습을 은밀히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제국의 이미지는 미국과 소련, 동유럽 국가의 합체에 가깝다. 혹자는 여기서 베트콩과 위치를 바꿔 베트남전을 다시 치르고 싶어하는 미국인의 잠재의식을 보기도 한다.

미국영화는 어디까지나 미국 국적을 지닌 일국의 영화일 뿐이다. 가끔은 그들에게 전 인류를 만족시키는 정치적 공정성을 왜 갖지 못하냐고 따지는 일이 도리어 그들한테 없는 과대한 권위를 인정해 주는 노릇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미국 국내영화제인 아카데미의 취향에 대해 밖에서 ‘성토’하기가 조금 열적듯이.

소망하던 기술력을 손에 넣은 <보이지 않는 위험>은 프롤로그답게 시리즈 전체 바탕그림이 되는 나부, 타투인, 코루스칸트 행성의 공간을 관객의 뇌리에 선연하게 구축한다. 포드레이스와 광선검 결투 장면은 <스타워즈> 특유의 유년기적 환상과 희열의 최고점을 이룬다. 특히 정련된 제다이 검법을 과시하며 다스 몰, 제다이 기사들의 성격과 운명을 교묘히 암시한 결투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명장면. 철이 덜 난 어른을 위한 영화라고들 말하지만 우리 안의 어린이들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나이먹지 않는다. 루카스나 스필버그의 성공도 관객 정신연령을 낮추어 잡는 전략에 기인한다. <보이지 않는 위험>은 여러 레벨로 프로그램돼 있다. 초보자도 나름의 재미를 느끼게 하고 관록있는 팬들은 캐낼 보람이 있는 코드와 후속편에 대한 실마리들을 심어놓아 사로잡는다. 앞서 살폈듯이 1편에서 교차한 씨실과 날실이 어떤 멋진 혹은 시시한 문양을 짜고 있었는지는 에피소드 2, 3에 가서야 제대로 품평받을 것이다.

영화사의 명장면을 놓치지 말 것

블록버스터들은 수직통합된 스튜디오 시스템이 해체된 후 더 적은 영화에 더 큰 자본이 몰리는 뉴할리우드 생산양식을 버티는 중추다. 토머스 샤츠가 지적했듯, 싫든 좋든 현대 미국 영화를 이해하려면 블록버스터를 뜯어보지 않을 수 없다. 종종 그들은 비평적으로 중요한 영화보다 영화의 운명에 더 결정적인 힘을 행사한다. 블록버스터들을 오직 돈 먹는 괴물이나 초강대국에서 온 오만한 사신쯤으로 정해두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을 소비하는 수많은 관객에 대한 결례이며 결국 영화사의 많은 흥미로운 광경들을 놓치는 결과가 될 지도 모른다.

영화에 은닉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신랄한 경고는 늘 귀중한 목소리다.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겸손하고 착실한 탐색의 시선 또한 행복한 영화 체험을 균형있게 부축하는 긴요한 힘이 되지 않을까.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