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아줌마, 극장가다] 리플리하곤 말도 안 할래, <리플리>
2000-04-11
글 : 최보은
그 대신 <사무라이 픽션> 권하는 이유
<리플리>

아줌마는 지난 보름 동안 영화를 보지 않았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있다가 그만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리플리> <감각의 제국> <썸머 오브 샘> <엑기> 이렇게 밑줄 쫙 그어놨었는데, 언론에 따르면 열린 사회의 적들이 하필 아줌마가 보고 싶은 작품만 골라 신나게 가위질을 했다는 거다.

수입사들이 134분짜리 <리플리>를 16분 자르고, <감각의 제국>에선 5분 쳐내고 <엑기>는 134분에서 100분만 남기고, <썸머 오브 샘>은 135분에서 5분 지우고,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 차라리 잠 자지 절대 안 보지, 결심했던 것이다.

왜냐. 아줌마가 보고 싶었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는 없어지고 대신 김이박 밍겔라 또는 박김최 밍겔라 감독의 짜가 <리플리>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밍겔라는 밍겔라 아니냐 한다면, 이번엔 간단한 산수를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아줌마의 변강쇠 이용요금이 134분당 6천원이라면, 강쇠가 16분 ‘조루’할 때 아줌마는 716원40전 손해본 거다.

그러니 이 물건들은 아예 이용을 하지 않거나, 이용한다면 손해본 만큼 집단 배상청구소송을 해야 한다. 어쩌자고 <씨네21>은 이런 걸 개봉작이라고 지면에 소개하며, 어쩌자고 관객은 생떼같은 돈내고 이런 걸 봐주는 거냐.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 본 영화가 없어서 입장이 궁해진 아줌마는 김수영이 어느 시평에서 쏟아낸 독설을 어떻게 비틀어서 써먹어볼까 한동안 잔머리를 굴렸다.

“이달같이 논평의 대상이 될 작품이 없는 달에는 <시단월평> 같은 것도 사보타지를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현대문학>에 발표되어 있는 작품이 15편이나 되는데 한결같이 태작이다. 잡지사도 이런 작품을 시라고 해가지고 낼 바에야 아예 휴간을 하는 것이 체면이 설 것 같다.”

딱히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옮겨놓고 보니 ‘분노할 능력을 박탈 당한 우리’의 오늘이 새삼스럽다. 안 그래도 이 야만적 사태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씨네21> 한호 쉬라고 하면 어떨까 관계자들의 의중을 떠봤더니, 인간아 정신차려, 머 가끔가다가 <씨네21>이 제때 못나오는 사고가 난다면 구경꾼 입장에서는 재밌겠지만. 그럴 리 없으니 잔머리 스톱하고 떨던 수다나 계속 떨라는 만장일치 판결문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구보씨가 만장일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런 범생이적 잔소리 때문에 잘린 영화 절대 안 본다는 아줌마 결심을 막판에 엎은 건 아니다. 아줌마가 <리플리>를 보게 된 경위는 이렇다.

식목일을 기념하여 산전수전 척박한 인생에 나무 한 그루 심는 기분으로 술을 끊은 아줌마는, 실로 오랜만에 맨숭맨숭 맨정신으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송곳 떨쳐들고 허벅지에 구멍 낼 나이는 지났지만, 원샷 받게그녀 또 원샷 받게그녀 권주가를 곁들이지 않은 십오야 긴긴 밤을 무슨 수로 땡처리하랴. 그리하여 아줌마가 <반칙왕>과 <리플리> <사무라이 픽션> 세편을 단돈 칠천원에 볼 수 있는 <씨네21> 제공 할인쿠폰을 들고, 심야극장을 찾게 된 것이다(이 쿠폰은 약간 사기였다. 인터넷 들어가면 누구나 공짜로 내려받을 수 있고 은행이고 어디고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걸 책까지 오리게 만들다니).

장면 바뀌어 인구밀도가 독도 수준인 극장 안. 극장이 안방인 양 이리 눕고 저리 틀고 양다리 공작날개처럼 뻗어 앞줄 손받이에 번갈아 걸쳐가며 영화를 보는 동안, 아줌마의 머리 속에서 재빨리 암산이 이루어졌다. 7000÷3÷134×16=278.61. 그래도 278원61전이나 손해잖아.

어쨌든 때가 되어 <리플리>는 시작됐고, 정해진 시간이 흐른 뒤 끝났다. 불이 켜지고 막간 음악이 흐르고 정해진 시간에 다음 영화 <사무라이 픽션>이 시작됐다.

제목만으로는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는데, 보나마나 피나 한 바가지 화면에 뿌려놓고 심심하면 배나 가르다가 말겠지 싶었는데, 그래서 잘렸는지 말았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었는데, 아줌마는 <리플리>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 다 풀고 복부 삼겹근에 알통 배기도록 웃고 또 웃었다. 개봉관에서 거의 다 내려갔던데, 안 보신 분들 정말 안됐다. 내용은? 돈주고 본 건데 왜 공짜로 갈쳐줘.

식목일만 지나면 가자마쓰라, 헤이지로, 한베, 세 남자를 안주삼아 약주 한잔 해야지, 굳게 다짐했다. 리플리는? 됐다 그래. 잘린 필름도 영화냔 말이지. 따라서 별점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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