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떤 규칙들을 이제 겨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어린 나이의 소년, 소녀들에게 어른들이 저지르는 꽤 폭력적인 질문, 그러나 어른 입장에선 꽤 즐기게 되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다. 하나가 넌 누굴 가장 존경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이다.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할 말이 없을 때면 곧잘 해대곤 하는 이런 질문이, 어렸을 적 내겐 꽤 골치 아프고 귀찮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들마다 나름 존경할 거리들이 만만치 않게 있었고, 무엇인가 되고 싶기엔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런 질문에 재빠르게 확신에 차서 대답하지 못하게 되면, 나보다 더 의기소침해지고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도 썩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질문에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뒤였다. 거대한 화면안에 불타는 사막이 광할하게 펼쳐지고 콤플렉스로 가득차 보이는, 뭔가 비어있고 나약해 보이는,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꽤 귀족적인 느낌의 피터 오툴과 이글거리는 사막 저편에서 점처럼 희미하다 조금씩 거대하게 다가오며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오마 샤리프는 나를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그 뒤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로렌스와 그의 사막 친구들이었고, 장래 희망은 사막으로 가서 베두인족의 일원으로 함께 생활하는 거였다. 뭐, 나의 확신에 찬 이 대답이 어머니를 결코 평온하게 해주진 못한 것 같았지만 나의 사막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스무살이 넘어, 당시의 실제 역사가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였고, 로렌스 역시 그 안에서 장기알처럼 도구화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한 단면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매혹적인 것들에 저당잡힐 때가 있다. 더군다나 피터 오툴이 더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체질인지라 사막에서 살기는커녕, 며칠동안의 여행조차 거부할 정도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난 <아라비아의 로렌스> 화면 안의 모든 것들에 여전히 매혹당했다. 기차를 보기만 하면 그 위에서 세상을 움직이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렌스를 떠올렸고, 그 영화로 인해 피터 오툴이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보려고 애썼고, 특히나 당시 텔레비전를 통해 방영된 피터 오툴 주연의 <마사다>는 나를 아침형 인간에서 늦은 밤 잠 못드는 인간형으로 변신시켰다. 어쩌면 나는 피터 오툴의 이미지에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 안에 끊임없이 갖혀버리고 말았던 나의 성장과정을 예지몽처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에서 김희라 선생은 캐릭터가 인정하는 범위의 경계선에서 어떤 빛을 느끼게 해준다. 때때로 나 역시 연속적인 빛을 뿜어줄 그런 영화 안에서의 파트너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커플이 나에겐 이장호-김희라 커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