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정복하지 못한 대륙, <남극일기>
2005-06-01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장르영화로서 <남극일기>가 가진 야심과 한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남극이 발견되기도 전에 남극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고대 문명이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수수께끼의 고대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논리는 좀더 단순했다. 하나, 지구는 둥글다. 둘, 유럽과 아시아는 북반부에 있다. 셋, 만약 지구가 뒤집히지 않으려면 남반부에 이들의 크기에 맞먹는 커다란 대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보면 귀엽기 짝이 없는 논리지만, ‘미지의 남쪽 땅’(Terra Australis Incognita)라는 대륙이 문명사에 등장한 건 바로 이런 경로를 통해서였다. 여기서부터 남극은 고유의 차별성을 부여받게 된다. 보통 대륙이란 발견 이후에 명명되고 지도에 그려진다. 하지만 남극의 경우,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의 머릿속과 지도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남극은 꿈의 대륙으로 탄생했다.

몽상가들의 대륙, 남극

19세기에 실제 남극대륙이 발견된 뒤에도 여전히 이 대륙은 꿈의 영역에 남아 있었다. 추위와 위치 때문에 사람들이 도달하기는 힘들었고 존재 이외엔 알려진 것도 없었다.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으며 가기도 힘들다면? 그곳은 몽상가들의 세계가 된다.

19세기 이후로 남극대륙은 몽상가들의 전쟁터였다. 에드거 앨런 포는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서 신비의 고대 문명을 발견했고 H. P. 러브크래프트와 존 캠벨 주니어는 외계인과 외계문명을 발견했다. 아틀란티스에 매료된 환상가들은 남극이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할 것이고 지구공동설을 믿는 사람들은 남극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할 것이다. 아직도 이들의 환상은 먹힌다. 남극에 가본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그 두터운 눈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 역시 현실적인 남극보다는 포와 러브크래프트가 사는 꿈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포처럼 백지장에 상상의 남극지도를 그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임필성이 남극을 다루는 방식은 선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은 미지의 대상이고 분명히 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위협적이다. 물론 불안한 정신이 휘두르는 집착이 여기에 끼어든다면 상황은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서부극의 총질처럼 지극히 장르적이며 지금까지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가며 수없이 되풀이돼왔던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극일기>의 남극과 남극탐험대의 모험은 오히려 백지처럼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극이라는 구체적인 위치가 아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이 미지의 대륙은 그 위를 탐험하는 탐험대원들에게 그들의 감정과 기억을 투영할 수 있는 스크린이 된다.

이 때문에 한국 관객에게 <남극일기>는 무국적적인 모험담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남극일기>에 등장하는 여섯명의 한국인들은 허구와 현실 속에서 남극 탐험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일을 겪지만 최종 결과는 다르다. 결국 그들은 한국인이고 그들의 역학관계와 그들이 꾸는 꿈은 한국적이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주제를 찾아 깊이 파는 것은 쉬운 일이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최도형 대장은 폭압적인 가부장의 대표일 수도 있고 ‘하면 된다’ 정신으로 무조건 사람들을 밀어붙이던 한국사회의 상징일 수도 있다. 아마 임필성의 단편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주제가 더 의미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여러분이 영화를 본 뒤 직접 읽어낼 일이다. 오늘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깊은 주제보다는 영화의 표면을 한번 긁어보는 게 더 유익할 것 같다. 과연 이 영화에서 사용된 도구들은 관객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인가?

자유의 남용으로 논리는 실종되고

일단 <남극일기>의 장르를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자. 이 영화의 소재는 남극이라는 고립된 미개척지를 무대로 한 탐험가들의 도전이다. 하지만 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장르는 오히려 전통적인 귀신 들린 집 영화이다. 귀신 들린 집 영화의 주인공들이 귀신이 나오는 저택에 갇혀 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남극이라는 거대한 대륙 한가운데 갇혀 있다. 영화는 실제 귀신이나 괴물들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대신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서서히 이성을 잃어가는 탐험대원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헬하우스의 전설> 같은 단도직입적인 오컬트영화보다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이나 스티븐 킹,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셜리 잭슨, 로버트 와이즈의 <더 헌팅>쪽에 더 가깝다. 이중 <샤이닝>은 감독이 직접 언급한 영화이니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은 아니라고 믿어도 좋다.

이런 설정은 언뜻 보면 굉장히 편리하다. <헬하우스의 전설>이나 <식스 센스>처럼 초자연현상을 그대로 끄집어내 활용하는 작품에서는 논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헬하우스의 전설>과 <식스 센스>의 유령들은 그들 세계를 지배하는 정연한 논리 속에서 움직인다. 관객에겐 초자연현상으로 이해되는 모든 음침한 사건들은 적어도 그 세계 속에서는 자연현상이다. 만약 영화의 유령들을 묘사하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부여했다면 작가나 감독은 그 규칙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샤이닝>과 <더 헌팅>의 방향을 택한다면 이런 귀찮은 논리들은 포기할 수 있다. 진상을 밝힐 필요가 없으니 결말에 신경쓰지 않고 막 나갈 수 있다. 개별 초자연현상의 묘사 역시 전후 맥락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상상력을 마구 펼칠 수 있다. 정말 부러울 만큼 엄청난 예술적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임필성 역시 각본을 쓰면서 그 자유를 마음껏 즐겼음이 거의 확실하다. 게다가 이런 식의 접근법은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무척 남극적이기도 하다. 물론 그 ‘남극적’이라는 건 50년대 SF에 나오는 화성의 운하가 ‘화성적’인 것과 같은 의미이지만, 이런 식의 환상담에서는 문화적 전통은 과학법칙만큼이나 중요하다.

문제는 그 자유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이다. <남극일기>의 가장 큰 실패는 바로 그 자유를 남용했다는 데에 있다. 아니, 남용했다기보다는 그 자유의 가능성을 너무 믿었다는 데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임필성이 만들어내는 환상들은 꽤 다양하다. 어떤 것은 80년 전에 죽은 영국 남극 탐험대원의 유령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오래전에 죽은 가족의 유령이다. 어떤 때는 남극의 얼음 속에 얼어붙은 고대의 매머드가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존 캠벨 주니어식 외계인의 흔적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우린 이 모든 걸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설명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구별은 필요하다. 남극 탐험대원의 유령은 탐험대원의 환상일 수도 있고 진짜 유령일 수도 있다. 가족의 유령은 거의 전적으로 주인공의 환상이다. 물론 그 환상을 주입한 것이 누구인가에 대해 계속 질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매머드와 잔 속에서 껌뻑거리는 커다란 눈은 어떤가? 매머드는 그래도 탐험대원의 눈을 통해 관찰되었지만 눈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 외계인 눈은 객관적인 실체로 묘사된 것인가?

매머드와 외계인에 이르면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논리를 찾게 된다. 어느 사이에 그들은 빙하와 눈처럼 구체적인 자연의 일부가 된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면 남극 빙하 속에 얼어붙은 매머드는 시베리아의 펭귄처럼 생물학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관객이 좌뇌를 굴리기 시작하면 비논리의 매력은 사라진다. 오히려 이건 <아이스 에이지>에 나오는 얼어붙은 공룡에 더 가까운 것이 된다. 껌뻑이는 눈은 어떤가? 논리가 필요한 건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외계인인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남극의 고대 생물인지, 남극의 눈인지 꼭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등장하고 사라지기엔 이 눈은 이질감과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장르에 맞는 무언가를 더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극일기>는 그 담을 넘을 수 있을 만큼 융통성 있는 영화는 아니다.

상투적인 접근방식의 불완전한 장르물

결국 이 모든 건 스타일과 테크닉의 문제이다. 쉽게 광기로 빠지는 인간의 도전정신과 집착이라는 영화의 주제, 남극이라는 공간이 가하는 물리적, 심리적 압박과 같은 사실적이고 큰 덩어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영화가 고유의 질감을 갖추고 있고 충분히 관객에게 먹힐 수 있는 효과적인 꿈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스러울 만한 성취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남극일기>는 너무 일찍 도전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양보다는 아이디어를 골라내고 다듬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이 이 장르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선 뒤에 시도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남극일기>는 표면상 그렇지 않아 보여도 엄격한 장르물의 세계에 속해 있는 작품이고, 이런 작품들을 시도할 때는 과거의 전례들과 테크닉들에 대한 연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반대로 때가 너무 늦은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남극은 에드거 앨런 포나 러브크래프트의 남극이 될 수 없다. 이미 남극점은 정복되었고 지도는 완성되었으며 대륙엔 수많은 과학자들과 그 밖의 방문객들이 살고 있다. 아무리 남극이 여전히 미개척지라고 해도 그곳은 어느 정도 통제되고 탐사된 곳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접근법은 어느 정도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하드 SF작가들이 화성의 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더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남극일기>는 탐사대원들에게 잘 작동되지 않는 첨단 기기들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 정도의 의무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 가지 더. 도대체 왜 이 영화의 탐험대원들은 남극일기를 그렇게 막 다루는 걸까? 그건 이베이에서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상자를 막 부수고 대원들에게 공짜 선물로 넘겨주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남극일기>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영화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아직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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