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베를린에서 만난 <리플리>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
2000-03-21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영화만들기는 축복이자 저주”

셰익스피어의 후예들이 재능을 겨루는 유서깊은 영국 연극무대는 때로 할리우드에 새로운 인재의 공급원이 되주곤 한다. 97년 아카데미 감독상의 앤서니 밍겔라(46)나 <아메리칸 뷰티>의 샘 멘데스. 영국인 영화감독들 가운데서도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눈부신 볕을 쪼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영국 연극계 출신이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에게서 높은 점수를 따낸 밍겔라는, 곧바로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가 탐내는 감독이 됐다.

물론 그가 하루아침에 스타 감독 대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 이전에 영국 연극무대의 희곡 작가, 그리고 TV 드라마 작가로 활동해왔다. 91년 영화 <정말로 미친듯이 깊이>로 연출 데뷔해 <미스터 원더풀>로 이어지는 잔잔한 로맨틱 코미디의 행진을 마치고, 안정된 구성의 원숙한 러브 스토리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관객의 감성 코드에 정확히 접속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차기작으로 내정된 작품은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콜드 마운틴>이었으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잘난 리플리씨>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콜드 마운틴>을 앞지르고 말았다. <잘난 리플리씨>를 영화로 번안 소개하는 것은, 59년 르네 끌레망이 연출하고 알랭 들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에 이어 앤서니 밍겔라의 <리플리>가 두 번째. 그는 리플리라는 캐릭터에서 먼저 ‘인간’을 읽었고,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적어도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얼마간 나 아닌 남을 가장하곤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현대인의 우화’를 이끌어냈다.

지난 2월9일부터 20일까지 열린 베를린영화제 본선 진출작 <리플리>의 기자 시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주요 출연진 맷 데이먼, 기네스 팰트로, 주드 로를 대동하고 나타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을 만났다. 그는 작가의 경력이 묻어나는, 문학적이고 조리있는 말솜씨, 또렷하고 나직한 바리톤 보이스로, <리플리>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이야기했다. 2월13일 오전,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기자회견장.

-원작 소설도 있고,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것은 왜인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인의 유럽 체험담이다. 미국인들에겐 유럽을 매우 자유롭고 신비롭고 낯선 세상, 작가와 예술가들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아이디어가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다른 하나가 강박관념이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에게 집착하게 되는 과정. 살인을 저지르고도 벌받지 않는 완전범죄 이야기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난 <리플리>가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작품은 주인공이 남의 돈에 집착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사회 비판적 코멘트를 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작의 더 깊은 주제에 조응하는 각색을 하려고 했다. 원작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즉흥적인 창작을 가미했다. 이 영화를 러브 스토리로 이해한다면 기쁠 거다. 이건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어둡고 지독하고 슬픈 러브 스토리다.

-소설 각색을 직접 했는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좋아하는 소설을 영화화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원작과 다른 언어로 독립하느냐에 있다. 이제껏 할리우드가 그래왔듯 개인적으로 별 애착이 없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도 했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태만해지거나 작품의 핵심을 위반할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될 테니.

-영화로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각색 포인트는 어디에 두었는지.

=얼핏 순수 서스펜스 스토리인 것 같았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심오하다고 느껴졌다. 리플리는 20세기 젊은이들, 그들의 분노와 혼돈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세상과 단절돼 있다는 느낌,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정체성을 가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다. 클라크가 슈퍼맨이 되는 정체성의 변환. 남을 죽이고 남을 가장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남을 가장해 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가지를 풍부하게 뻗칠 수 있었다.

-오래 계획해온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내가 처음으로 쓴 대본을 보고, 누군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군지 몰라서, 작품을 찾아 읽어 봤다. 훌륭한 작품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내 감성과는 동떨어진 것 같았다.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16년, 17년쯤 지나 <잉글리쉬 페이션트> 헌팅차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는데 시드니 폴락이 내게 연락을 했다. <잘난 리플리씨>의 판권을 갖고 있는데, 각색해 볼 의향이 있냐는 것이었다. 돌아와 다시 소설을 읽어보니, 더이상 애가 아닌, 성숙한 어른이 된 나의 감성에 어필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시드니에게 ‘남에게 주기 아까운데, 내가 해도 되겠냐’고 말했다. 만일 이 작품에 불만이 있다면, 원작을 독점 사용한 나를 탓하길.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더할 수 없이 ‘개인적인’ 작품이 됐으니까.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 한 미국인이 다른 미국인을 죽이는 이야기가, 20세기 말의 영국 감독인 당신에게,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이라는 얘긴가.

=매일밤 하루를 반성하는 기도를 올리는 가톨릭으로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축복이고 저주다. 난 연옥이 있다는 걸 믿는다. 그리고 리플리가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길 소망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벗어나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범행이 발각되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거긴 아예 출구가 없으니까. 난 리플리의 인간성을 믿는다.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영혼과 실체가 화해하는 순간, 찾아온다. G.K. 체스터턴이 이런 말을 했다. ‘어린 시절엔 순진하고 결백하므로, 정의를 찾지만, 어른이 되면 죄에 물들어, 자비를 구한다.’ 이게 바로 톰 리플리의 이야기다.

-완벽하고 반듯해 보이는 맷 데이먼을, 왜 사악하고 불운한 리플리에 캐스팅했나. 그의 어떤 면이 리플리에 적역이라는 믿음을 심어준 것인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캐릭터의 행동과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 캐스팅은 그런 믿음직한 배우를 작품에 앉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화는 다름 아닌 삶의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또는 이웃한 나라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 관계, 그를 둘러싼 현실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나. 나는 그래서 사람들이 연민을 느낄 수 있고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스토리를 특히 좋아한다. 처음 맷 데이먼을 만났을 때 그가 바로 누구든지 같이 있고 싶어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고, 영원히 친구 삼고 싶은 사람. 그런 데이먼이 리플리를 연기함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를 뛰어넘어, 관객이 너그러이 믿고 이해할 만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었다.

-리플리에 주드 로, 디키에 맷 데이먼, 이렇게 두 사람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맷 데이먼은 순식간에 스타가 된 배우가 아니다. 그의 지나온 삶은, 리플리와 같진 않지만, 리플리를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를 지녔다. 데이먼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는 장면에서, 그가 리플리여야 하는 이유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발견하고, 다른 이를 통해 삶의 판타지를 키워가는 과정을, 누가 그만큼 자연스럽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주드 로 역시 완벽하고도 기품있는 외모로 디키에 어울리는 배우다. 더없이 잘 들어맞는 이들의 캐릭터를 바꿔 대입할 이유가 없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리플리> 두 작품의 배경이 모두 40∼50년대다. 시대극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인가.

=글쎄, 그런 것 같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 중 하나는, 맘껏 상상하고 재창조하는 데 있다. 만드는 사람들, 보는 사람들이 다 같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노니는 기분이랄까. 세트를 만들고 의상과 소품을 맞추고, 그 시대의 그 공간을 재현하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작업들이 좋다. 시대극의 배경을 그리는 데 있어서, 정확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나의 상상을 보태,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하는 동안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떠올렸다.

-오스카 수상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는가.

=이 작업 자체가 자랑스럽다. 맷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 케이트 블랑슈, 필립 세무어 호프먼, 카메라 앞에서 열연한 모든 배우들, <잉글리쉬 페이션트>부터 호흡을 맞췄던 카메라 뒤의 모든 스탭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노고가 인정받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연연하진 않을 것이다. 상을 받는다고 해서 작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수상 여부로 평가가 달라진다고 믿진 않는다. 상은 그냥 상일 뿐이니까.

-전작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수상 경력이 감독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오스카는 영화감독에게 활용 가치가 있는 중요한 기회다. 감독이기 이전에 난 작가였다.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쉽다.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되니까.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널려 있다. 카메라 등 기자재도 구비해야 하고, 2천에서 4천만달러의 돈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만들려면 그렇게 남의 돈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수상은 내게 좀더 좋은 여건을 마련해 줬다.

-차기작 계획은. 원안으로 또 소설을 생각하고 있나.

=<리플리>를 만들면서 소설 각색은 다시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차기작으로 그전부터 점찍어둔 프로젝트가 찰스 프래지어의 <콜드 마운틴>이다. 남북전쟁을 다룬 작품이고, 욕심 부릴 만큼 좋은 소설이다. 그리고 버나드 시링크의 <리더>에도 흥미가 있다. 그렇지만 한편의 영화를 기획하는 데도 워낙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7∼8회 수정을 거듭하기 때문에 앞으로 몇년 이내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를 벌써 말하는 것은 조금 경솔한 짓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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