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모차르트? 살리에리! <산책>의 김상중
2000-03-21
글 : 이혜정
글 : 이유란 (객원기자)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다섯살 난 꼬마가 있었다. 꼬마는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극장을 쥐방구리(?)처럼 들락거렸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꼬마는 하루에 3개의 개봉관을 전전하며 영화를 섭렵했고 일본어판 <스크린> <로드쇼>를 정기구독했다. 일본어는 읽을 줄 몰랐지만 영어로 쓰인 영화제목, 배우와 감독 이름, 스틸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고등학생이 된 꼬마는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의 마력에 빠졌고 고2 때는 동랑청소년연극제에서 상도 받았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꼬마는 ‘연극’과 ‘연애’에 20대를 몽땅 던졌고, 30대 중반에 이른 지금에는 영화와 TV, 연극을 넘나들며 연기와 함께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 꼬마가 바로 배우 김상중(35)이다. “영화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영화에 좋았다. 요즘 아이들이 스타크래프트에 미치듯 난 영화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미쳤다”라는 표현은 왠지 김상중에게 어울리지 않아보인다. 줄담배를 피는 채 좀체로 목소리톤이 흔들리는 법없이 자기의 옛날을 나긋나긋이 풀어가는 그에게서 달뜬 열정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외려 작은 레코드가게를 자기만의 우주로 삼아 조용한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산책>의 영훈이나, 까까머리 중학생들을 쓰다듬던 그 옛날 <사춘기>의 따뜻한 선생님을 연상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는 “<산책>의 영훈이 혹 자기 모습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가차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영훈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일 뿐이죠.” 그는 5월 개봉을 앞둔 <아나키스트>의 그룹 리더 한명곤이 자기를 더 닮았다고 했다. 날카롭고 냉철하고 자기 절제와 의지가 강한 한명곤이 자신의 내면풍경이라고. 그러고보니 그는 TV드라마에서 윤봉길 의사나 김구처럼 강직하고 지조 굳은 인물을 그려냈고, <고스트>에서는 악의 카리스마를 분출하기도 했다. “전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이죠. 남에게 흐트러지고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남 앞에서는 울지도 않아요. 이젠 우는 연기도 안 되요. 군대에 가기 전엔 안 그랬는데. 현실에 지치고 여유가 없어서 눈물도 메말랐나봐요.”

이렇게 말할 때 그는 삶의 쓸쓸함을 미소로 잊어버리려는 <산책>의 영훈을 닮았다. 인간 김상중이 녹아 있지 않은 캐릭터로서의 김상중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내 안의 천진함이 없었다면 <마리아와 여인숙>의 바보 기태의 천진함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고스트>에서는 새삼 “내 안의 양면성”을 느끼기도 했다. “배우의 연기를 보면 사생활이 보여요. 눈빛을 보거나 어떤 순간에 그걸 느껴요. 속일 수가 없어요.”

김상중은 스스로를 “살리에르”에 비유했다.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모차르트 같은 배우도 있지만 그는 노력과 연습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TV에 입성해서 TV연기 테크닉에 난감해하던 무렵에는 다른 탤런트들의 연기를 열심히 지켜봤고 <목욕탕집 남자들>에 출연할 때는 선배 윤여정의 집으로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목욕탕집 남자들>의 호준은 원래 그를 염두에 둔 캐릭터도 아니었고, 비중도 크지 않았지만 나중에 김수현씨는 한번에 32페이지에 이르는 대사를 그에게 맡겼다.

“난 굉장한 노력파”라고 하지만 그는 무턱대고 “하면 된다”를 믿지 않는다. 그는 노력만큼 ‘운’과 ‘순리’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싣는다. “순리대로 살아야 운이 따르죠.” 그보다 더 쉽게 성공한 배우도, 그보다 더 열심히 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배우도 있지만 그건 다 운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운은 ‘요행’이 아니라 준비되고 만들어진 운이다. 그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운이 좋아서 89년 단막극 <님이여>로 TV에 데뷔한 뒤 긴 휴지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올해에도 이미 2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2편의 드라마에 출연중이다. “이젠 쉬고 싶어요. 충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는 쉽사리 휴식을 선택할 것 같진 않다. 지금도 연기가 무척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는 일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일로 푸는 ‘워커홀릭 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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