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군 투덜양]
[투덜군 투덜양] 저 멀리 이해불능점을 향하여, <남극일기>
2005-06-10
글 :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투덜군의 <남극일기> 관람일지

이 기사는 <남극일기>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관람 전 D-8일 14시간43분0.7초 내에 ‘남극 과학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꿈과 사랑과 모험과 낭만과 역경과 우정이 너울져 파노라마치는 감동 드라마’ 뭐 이런 걸 연상시키는 제목 위에 난데없이 “남극 최초의 미스터리”라는 헤드카피가 박혀 있다. 하긴 최초겠지. 누가 굳이 거기까지 가서 미스터리를 하려고 했겠는가.

D-57분 표를 샀다. 여전히 ‘남극 미스터리’라는 대목은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는 상태다. 그런데 설마 그 미스터리라는 것이 ‘남극탐험에 나선 대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씩 미쳐가면서 서로를 죽인다…’ 뭐 이런 설정을 지칭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건 지난해에만 해도 <알포인트>가 한번 했던 얘기 아닌가.

D-18분 12초 전 회를 본 관객의 표정이 포스터 속 송강호 수염만큼이나 얼어붙어 있다. 불길한 조짐. 하지만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이 시점에서는 오로지 앞으로 나가는 길뿐이다.

관람개시 +15분37초 처음부터 계속됐던 우중충하고도 꾸리꾸리하고도 갑갑한 분위기가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 영화는 ‘감동 드라마’ 따위와는 한참 거리가 먼 영화다. 미련을 버려야 한다. 이제는 정말 관람 목표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1시간02분33초 영화가 시작된 지 1시간이 넘도록 이렇다 할 맥락이 잡히지 않는다. 디테일이 엄청나게 보강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듯한 기분. 설상가상으로, 예감대로 영화의 스토리는 탐험대원들을 하나씩 미치게 하는 설정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왕 이럴 거였다면, 전반부에는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탐험대원들의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의 파국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올 테니까 말이다. 하나 그들은 초장부터 모두 조난자스러웠다.

+1시간13분03초 아직까지 변변한 유머 한번 나오지 않았다. 남극에 없는 것이 감기 바이러스뿐만은 아닌 것 같다.

+1시간27분28초 설원 한가운데서 홀연히 나타나 아리아를 흘려보내는 낡은 카세트로 조장된 공포, 그리고 그것을 장렬히 뽀갬으로써 표현되는 탐험대장의 광기…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오토매틱으로 음악을 흘려보내던 그 카세트도 상당했지만, 짐을 1g이라도 줄여야 할 탐험대가 그런 빨랫비누 10개들이 한 상자 크기의 카세트를 들고 다니는 설정 또한 상당하다.

+1시간47분54초 이 영화의 정체가 감동무비도, 탐험무비도, 극기무비도 아닌, 사지절단 무비였다니… 이럴 수가….

+1시간52분14초 아아, 내가 기껏 이 식상한 설교를 들으려고, 지금까지 그 피곤한 장면들을 참아 넘기는 고생을 한 거란 말인가!

관람완료 +32초 주최쪽의 얘기가 과장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진정 ‘체험적 모험영화’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아낸 것만으로도 앞으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든다(일지 끝, 2005년 5월23일 마지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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