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의 일본 흥행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지난 1월22일 도쿄 시내 13개관을 비롯 일본 전역 37개관에서 개봉한 <쉬리>가 개봉 5일간 90% 가까운 좌석점유율을 보이며 승승장구, 현재 전국 120개 극장에서 관객 80만명을 돌파했다. 수입사인 시네콰논, 배급사 어뮤즈, 제작사 강제규필름은 4월7일 <쉬리> 배우, 감독을 초청해 관객 100만명 돌파 기념행사까지 준비하고 있다. 강제규필름은 “당초 4월11일 종영을 예정했지만 4월 말까지 연장상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최종관객 수는 130만∼15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자신한다. 관객 100만명을 넘을 경우 예상되는 흥행수익은 10억엔(약 100억원). <쉬리> 일본판권가격은 130만달러(약 15억원)였고 홍보비로 약 3억엔이 투자됐다.
미국 메이저들, <쉬리> 판권 검토중
<쉬리>의 해외흥행 가능성은 지난해 홍콩에서도 입증됐던 일이다. 지난해 11월4일 홍콩 16개 극장에서 개봉한 <쉬리>는 개봉 첫날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4일간 187만홍콩달러(약 2억7천만원)를 벌어들였다. 강제규필름은 9만홍콩달러에 팔린 <쉬리>의 최종 극장수입이 650만홍콩달러라고 밝혔다.
홍콩과 일본에서의 성공은 미국 메이저 배급사에도 알려졌다. 사실 <쉬리>가 서울에서만 244만 관객을 모아 <CNN> 등에 보도됐을 때만 해도 미국 메이저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배급사인 삼성에서 메이저 담당자들을 초청해 연 시사회에서 나온 반응은 “미국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장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지금 폭스, 컬럼비아, 미라맥스 등이 판권구매여부를 재검토하고 있다. 강제규 감독은 “일본시장에서 성공하자 다시 관심을 보인 거다. 메이저에 세계 판권을 파는 길과 칸영화제 마켓을 통해 지역별로 판권을 파는 두 가지 방향으로 미국, 유럽지역 수출을 추진중”이라며 3월 말쯤 메이저의 검토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했다. 할리우드는 <쉬리> 판권보다 강제규 감독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연출제의도 몇 차례 받았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은 “내가 할리우드에 가서 몇편 만드는 게 할리우드 진출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영화,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시장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영화로 상륙하는 것이 할리우드 진출이라고 생각한다”며 국내에서 활동할 계획임을 분명히 했다.
<쉬리> 도운 <8월의 크리스마스>
어쨌든 <쉬리> 신드롬이 바다 건너 일본까지 번진 걸 보면 한국영화의 해외시장 가능성은 한낱 구호에 그치던 몇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쉬리> 한편만이 일으킨 예외적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로 지난해 일본과 홍콩에서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들 수 있다. 해외배급을 대행한 포르티시모에서 정확한 흥행집계를 밝히지 않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가 일본, 홍콩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았다는 증거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키네마순보>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99년 외화 베스트 중 11위에 올려놓았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한석규에 대한 인지도는 <쉬리> 흥행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영화제 등을 통해 한국영화를 알린 수입사 씨네콰논의 역할도 컸다. 씨네콰논은 지난해 <강원도의 힘> <초록물고기> <퇴마록> <여고괴담> 등 한국의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를 열어 일본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지난해 도쿄영화제를, <쉬리>를 알리는 자리로 적극 활용했다. 도쿄영화제 폐막일에는 수상식 직후 <쉬리>를 급히 추가상영하기도 했고 개봉 전까지 관계자 시사회만 20여 차례 진행됐다. <쉬리>가 할리우드영화나 일본 메이저 영화들만 가능하다고 알려진, 수십개 극장에서 동시개봉하는 배급에 성공한 것은 이같은 사전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씨네21> 도쿄 통신원인 장필선씨는 일본 내 대다수 언론이 <쉬리>에 대해 호평을 했다며 “감독은 오락성과 로맨티시즘, 이 두개의 기둥을 잘 조합해 활기넘치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아사히신문> 기사와 <키네마순보> 1월 하순호에 실린 특집기사를 예로 들었다.
잘 팔린다, 한국영화
최근엔 <유령>과 <텔미썸딩>이 <쉬리>의 뒤를 잇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유령>이 일본 닛카츠에 40만달러에, <텔미썸딩>이 일본 가가 커뮤니케이션즈에 50만달러에 팔린 것이다. <유령>의 해외배급을 맡고 있는 튜브엔터테인먼트쪽은 닛카츠에서 <유령> 개봉을 올해 말이나 내년 초로 예상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 수출은 올해 칸영화제 마켓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텔미썸딩>은 지난해 대만에도 20만달러에 팔렸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의 두 스타 한석규, 심은하의 존재가 수입사의 구매의욕을 부추긴 걸로 보인다. 일본 개봉은 7월로 예정돼 있는 상황. <텔미썸딩> <미술관 옆 동물원> <주유소 습격사건> 등 시네마서비스 영화의 해외배급을 대행하고 있는 미로비전 이송원 해외마케팅 부장은 “마켓에 나가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지난해 칸영화제 마켓 시사 때는 15명 정도가 보다가 몇명은 중간에 나갔는데, 올해 베를린에서는 시사회에 70명 정도가 보러왔다. 큰 변화다. 이전에는 주로 영화제 관계자들이 많았는데, 올해 베를린에서는 여러 나라 업자들이 접촉해왔고 구체적인 배급조건을 논의할 정도였다. 또 아시아 업자들이 주류였는데, 유럽, 남미, 미국 업자들까지 구체적 협상을 벌였다. 이런 건 1, 2년 안에 나타난 성과가 아니라 지속적인 마케팅 결과”라고 말했다.
한국, 상업 영화의 가능성
실제로 미로비전은 단편영화 해외수출부터 지난 몇년간 각종 영화제와 마켓에 꾸준히 참가하며 한국영화 수출에 한몫을 차지했다. 미로비전 외에 새로 생긴 씨네클릭도 한국영화의 해외수출을 전담하는 회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씨네클릭은 인터넷에 해외세일즈를 위한 사이트(www.cineclick.co.kr)를 만들어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지속적인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는데 현재 <세기말> <춘향뎐> <태양은 없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유령> <조용한 가족> 등을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씨네클릭 해외마케팅 팀장 서영주씨는 “올해 AFM에서 포르티시모와 카날플러스가 <춘향전> 배급권에 관심을 보였고 일본, 홍콩영화보다 한국영화를 사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
해외 배급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건 아시아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과의 합작에 공력을 쏟고 있는 우노필름 대표 차승재씨는 “한국 상업 영화의 잠재력이 과거 홍콩영화의 위치를 넘볼 날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퇴마록> 프로듀서를 했던 영화사 뮈토스 대표 김익상씨는 H.O.T, 유승준, S.E.S 등 대중가요의 스타들이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 활약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한국영화계에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유령> <텔미썸딩> 등 해외수출에 성공하는 영화들을 보면 그릇된 판단이 아니다. 그 배경에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자국영화 시장점유율, 상업영화 시스템의 활기찬 움직임, 재능있는 작가들의 등장 등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송원씨는 “외국 바이어들은 한두편만 보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후속작 공급이 가능한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쉬리> 이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을 때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다음 영화들이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영화산업의 창조적 힘이 다시 한번 강조돼야 할 시점이다.
강제규 감독 인터뷰
"단합해서 규모를 키워야 한다"
-일본에서 흥행 요인은 뭐라고 보나
=우리가 들여다 보는 관점이 우리 중심이라는 게 문제다. <쉬리>가 일본에서 성공한 이유를 우리 시각에서 분석해보면 남북 분단을 소재로 했고, 어쩌고 하는 몇가지가 나오지만 일본 시장에 가보면, 그곳 업자와 관객들을 만나보면 그게 아니다. 우리 시각과 진단이 다르다는 게 재미있고 실감난다. 그들의 잣대는 대단히 단순하다. 뭔가 끌리고, 보니까 재미있고, 그래서 주변사람에게 권한다는 것이다. 그게 일본적인 거다. 할리우드적이어서 어쩌고 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식 해석일뿐이다. 그런식으로 단순하게 접근해야 한다.
-해외 시장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해외시장에서 한국영화의 한계는 분명하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영어대사가 아니라는 것이 치명적이고, 세계적인 스타가 없다는 것, 유색인종 영화라는 것도 핸디캡인게 사실이다. 심지어 흑인영화보다 유색인종 영화를 더 안본다. 하지만 홍콩 등 아시아나 유럽 등 틈새시장은 있다. 이미 나가서 선을 보인 영화들은 또다른 재미를 준다는, 한국영화를 친숙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로가 있다고 보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 <쉬리>도 그런점에서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쉬리>에 대해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외면했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관객들이 움직이니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유별나게 흥행이 되니까. 다시 들여다 보는 거고, 나름대로 잘만든 구석이 있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 잘되는 영화 있으면 감독이나 스카웃할까, 배급 한 번 해볼까 하는 정도였는데, 일본에서 터지니까 관심을 다시 갖는거다. 그들은 일본시장을 잘안다. 그런 일본시장에서 <쉬리>가 크게 흥행하고,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니까 에너지와 잠재적인 가능성을 눈여겨 보는거다. 일본의 영화관람 패턴에서 되면 유럽과 미국에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다. <쉬리>는 미국의 5대 메이저중 2개사에 프린트가 나가 있다. 우리가 자세를 낮추면 전세계 배급도 가능하다. 마지막 판단은 우리가 해야 한다. 좀 조건이 나빠도 미국 메이저를 통한 세계 배급을 택하든지, 아니면 칸영화제 벨트로 이어지는 시장에서 마지막 가능성을 찾든지 해야한다.
-강제규 감독에 대한 할리우드의 관심도 많다고 들었다. 무슨 제의를 받았나.
=제의는 많다. 메이저의 용역을 받는 프로덕션이나 프로듀서, 에이전시에서 제의는 계속있다. 하지만 대체로 한두달 뒤에 촬영할 영화 연출해달라는 식이다. 8천만불짜리도 있다. 지금 준비하는 작품 있으면 세팅해 주겠다는 곳도 있다.
-유럽쪽 시장은 어떤가
=유럽의 돌파구는 독일로 삼고 있는데, 베를린에서 있는데 독일의 큰 업체의 제의가 다 들어와 있다. 가격 문제가 걸려 있다.
-삼성이 손을 떼고 직접 뛰기 때문에 더 어려운 점도 있을 거 같다
=조직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은 있지만 오히려 스텝 바이 스텝으로 직접하면서 적극성과 돌파력은 더 낫다.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 바이어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바이어들은 대만이나 일본영화에는 관심없다. 오히려 한국영화가 대중적인 보편 정서를 지향하고 있다는데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아시아 영화, 한국영화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미미한 것도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산업적 경쟁력은 있다고 본다.
-해외 진출을 위한 선결과제는
=지금은 이합집산할 때가 아니라 에너지를 결집할 때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합해서 규모를 키워야 한다. 한국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권의 단합이 절실하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대목을 찾고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겸허하게. 지금이 이 타이밍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 지 모른다. 한국영화계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끼리 서로 견주고 아귀다툼할 때가 아니다. 거시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