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순이가 뜬다.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극본 김도우, 연출 김윤철)의 시청률이 빠른 속도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방송 4회만에 가구시청률 30%를 가뿐히 넘었다. 전반적인 티브이 시청률의 하락세를 고려할 때, 주간드라마의 선전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다. 지난해 3회에 30% 벽을 넘은 에스비에스 주말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낳은 ‘신드롬’이 예견되는 판이다. 마니아도 모였다. ‘삼순이와 삼식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3344’다. 밤을 새워가며 3344들이 드라마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벌써 2만여건이다. 대체적으로 “삼순이한테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고들 한다. 재벌 아들 진헌과의 연애가 본격화하며 기존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엉뚱한 판타지’로 흐를 걱정이 없진 않다. 그러나 아직까진 20~30대 미혼 여성의 공감이 <내 이름은 김삼순>이 지닌 가장 큰 힘이다.
어! 내 얘기잖아?=주인공 김삼순(김선아)은 그야말로 ‘삼순이’스럽다. 이름 만큼 인간적이고 평범하다. 특별히 잘 난 것도 없고 가진 게 많지도 않다. 예쁜 것도 아니다. 방앗간집 셋째딸에, 뚱뚱한 몸매와 엉뚱한 성격. 바람둥이 애인한테도 차였다. 그런 애인 쫓아다니다 직장도 잃었고. 천상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그렇지만, 당당하다. 잘 난 사장 진헌(현빈) 앞이나, 진헌 어머니 앞에서도 기가 죽거나 눈치 보는 일은 별로 없다.
순박하면서도 대찬
서른살 방앗간집 셋째딸
내숭과 거리 먼 엽기발랑
노처녀들 대리만족 열광
“뻔한 ‘신데렐라’ 로 끝나지않나” 하는 걱정은 있지만
“사랑과 결혼, 일과 미래에 대한 고민과 압박에 시달리는” 서른 즈음, “세상엔 돈 많고 예쁘고 집안 좋은 여자들보다 평범하게 노력하며 꿈을 일궈나가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삼순이를 통해 보게 된다”(시청자 안윤정씨)며 미혼 여성들이 열광한다. 삼순이를 보며 “나와 같은 처지”라고 느낀다.
삼순이와 가장 친밀감을 느낄만한 30대 여성의 시청률이 가장 높게 나온다. 시청률 조사회사 에이지비닐슨의 조사를 보면, 이들의 시청률이 1회 16.5%가 4회 29.8%까지 치솟았다. 30대 여성 10명 중 3명이 <내 이름은 김삼순>을 봤다는 얘기다. 20대 여성 시청률이 그 다음이다. 11.3%에서 23.6%까지 올라갔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30대 남성이 15.4%(4회)의 세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특이하다. “꾸밈없는 삼순이의 모습”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길을 끈다고 볼 법하다. 또래 여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엿보며 남성들이 느낄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판타지와 리얼리티 사이=‘판타지 없는 드라마’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속성상 불가능에 가깝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있다. 고졸인 삼순이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를 졸업한 제과기술사(파티셰)라는 설정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부잣집 아들인 레스토랑 사장이 삼순과 우연히 만나 계약연애까지 제안한다는 설정도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에 충실하다.
그러다보니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에 한참 유행인 만화적 감성이 뒤섞여, 사실상 다른 드라마와 차별성이 거의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의 서른살 노처녀의 애환이 꽤나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그래봐야 뻔한 신데렐라 아니냐”는 것이다. 원작 소설대로라면, 종국엔 재벌 2세인 젊고 잘 난 사장과 삼순이가 맺어질 운명이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곧 삼각관계가 예상되는데, 진헌이 옛애인 희진을 만나다가, 나중에 삼순이와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는 뻔한 스토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한지은씨)는 걱정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같은 판타지라도 일정한 구체성과 일상성이 담겨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 무리 판타지 속에 숨은, 일말의 ‘삶의 진실’이 드라마의 성패를 가른다. “삼순이는 다른 드라마보다 현실에 가까운 것 같다”(이주연씨)거나, “내용도 신선하고 러브스토리도 지금까지 보아온 코믹 멜로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르다”(김인우씨)는 등의 평가가 나온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아직까진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데렐라? 순대렐라!=<내 이름은 김삼순>은 판타지를 밑에 깔고도, 구체적인 일상을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드러내 시청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끌어모았다고 볼 수 있다. 일상의 구체적 묘사는 더욱 적나라한 모습으로 상당 부분 과장되면서, 설득력과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조금 지나치다 싶은 수준의 욕설까지도 숨기지 않고 터뜨리게 하는 식이다. ‘디브이디방’에서 진헌의 장난에 놀란 삼순이 집에 돌아와 “너무 오래 굶었어”라며 괴로워하는 우스꽝스런 모습 등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에 있음직” 하다. 시청자들의 호응은 대단히 좋았다.
여성들의 ‘러브 판타지’를 자극하는 <파리의 연인>류 드라마에서 등장해온 이른바 ‘캔디렐라’는 이제 더는 효과적이지 않다. “이 생에서 꿈꿀 수 없지만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에 머무는” 러브 판타지도 지겹거니와, ‘캔디렐라’ 캐릭터에도 시청자들이 물린 탓이다. “여름철에 활황세인 로맨틱 코미디의 전범을 다시 이용한다면 기대에 초치는 결과가 될 것”(차양원씨)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캔디렐라’로 만족할 리 없다.
뚜렷한 능력없이 ‘왕자’에게 기대기만 하는 신데렐라가, 그나마 겉모습은 당당하고 꿋꿋한 ‘캔디렐라’로 진화한 데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자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고 매우 독립적이면서도 평범하고 일면 순박한 여성 캐릭터가 삼순이다. 겉보기엔 ‘순’박하지만 실은 ‘대’찬, 그래도 드라마적 판타지 속에서 신데‘렐라’적 특성을 버릴 수는 없어, ‘순대렐라’라고 불릴만하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은근한 풍자와 웃음 뒤 아련한 페이소스 등을 가능케 하는 것도 순대렐라 삼순의 특징이다. 순데렐라와 신데렐라는 같은 대리만족이면서도 각각 ‘의식적 공감’과 ‘몰아적 감정이입’을 낳는 차이를 보인다. 삼순이에게 거는 기대가 큰 이유도 여기 있다.
김선아, 맨얼굴 ‘백조’ 연기에 “박수”
‘내 이름은 김삼순’ 안방극장 금의환향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삼순’을, 재벌 2세 꽃미남인 전·현 남자친구를 거두절미한 채 캐릭터만 놓고 보자. 김삼순은 드라마라는 판타지 속에서 이슬만 먹고 살던 청순가련형 여주인공들이, 반세기 동안 부단히 진화한 끝에 탄생한 ‘현실 기반형’ 캐릭터다.
그리고 4년 반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와 이 진화한 여주인공을 가장 그 답게 표현하고 있는 김선아를 보자. 그는 브라운관을 떠나 스크린 속에서 김삼순을 향해 진화를 거듭해왔고, ‘김삼순’은 김선아가 스크린에서 구축해온 이미지의 결정체다.
<예스터데이>(2002)의 여전사로 스크린에 데뷔한 김선아는, <몽정기>(2002)의 교생 ‘김유리’를 통해 ‘김삼순’으로 진화하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김유리’는 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 답지 않게, 청순한 교생이었다. 막무가내로 망가져 웃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얌전 빼고 청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선아는 단정한 단발머리에 흰 원피스를 차려 입고 한껏 청순한 척을 하면서도, 윗 입술이 살짝 들린 두터운 입술을 오물거리고, 오동통 발그레한 두 볼의 근육을 움찔거리다가, 눈초리가 살짝 처진 큰 눈을 꿈뻑거리면서 관객들을 웃겼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김선아표 웃음코드로 자리잡았다. 이를 두고 <몽정기> 정초신 감독은 “김선아의 새로운 면을 120% 보여줬고, 새로운 여배우의 탄생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애인에 버림받아 펑펑 울고 술에 취해 망가진 모습과 백조같은 일거수 일투족이 리얼하다
적재적소에서 신비감 허물줄 아는 그의 코믹연기는 무르익었다
김선아는 <위대한 유산>(2003)의 백조(여자 백수) ‘장미영’으로 코미디 연기에 안착했다. 그는 퍼머 머리를 산발하고 눈두덩에 마스카라를 범벅한 채 눈물을 쏟아내며 생생한 백조로 거듭났다. 긴 생머리를 펄럭이는 전지현이었다면 너무 우아해서, 우스운 사투리를 구사하는 김정은이었다면 너무 과장돼서 묻어나지 않았을 맛과 향이, 김선아에게서는 묻어났다. 이는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노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 설 정도로 리얼리티를 살린 결과다. 특히 뜨거운 사발면을 급하게 먹다가 뱉어내고 이를 다시 입으로 밀어넣던 털털한 백조의 모습에서는 ‘한 입 가득 음식을 물고 있는 모습이 가장 그럴듯한 여배우’라는 생각마저 갖게 할 정도였다. 이 역시 입 천장이 벗겨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노력의 흔적이다.
애초 캐스팅에 반대했다가 ‘장미영=김선아’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이른 오상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김선아는 <위대한 유산>의 시나리오를 스스로 찾아 낚아챘을 정도로 영민하고 집요하며, 노력으로 역할 비중을 키웠을 정도로 성실하다. 김선아의 특장인 코미디 연기는 적재적소에서 신비감이라는 벽을 허물 줄 아는 지혜와 끊임없는 노력에서 나온다.”
딱히 인상적일 게 없는 영화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2003)와 <황산벌>(2003)에서 ‘여전히 웃기다’는 평가에 안주하는 듯했던 김선아는, 후속작 <에스 다이어리>(2004)를 통해 ‘김삼순’으로의 진화를 마무리지었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만 연애하는 족족 차이고, 자신을 찬 남자들에게 ‘잠자리 비용’을 청구할 정도로 엉뚱하지만 소탈하고 투실투실한 스물아홉 노처녀 ‘지니’는 영락없는 ‘삼순이’다.
김선아의 코믹연기는, 7편의 영화를 통해 술에 취한 모습이 리얼해지고, 실연 상황에서 망가지고, 일거수 일투족까지 백조다와지는 만큼씩 무르익어 왔다. 아래 턱이 앞으로 살짝 돌출된 구강구조와 오랜 외국생활에서 비롯된 부정확한 발음도 상당히 교정돼, 이제는 부정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살짝 어눌해서 순수하고 코믹하다는 느낌을 준다.
김선아는 ‘삼순이’가 되기에 앞서, 물오른 연기력을 바탕으로 영화주간지 <씨네21>의 ‘2005 스타파워 20’에서 여배우 가운데 4위를 차지했다. 또 사실상 ‘여배우 원톱’ 영화였던 〈S 다이어리〉(2004)와 <잠복근무>(2005)에서는 코믹, 액션, 멜로를 두루 섭렵하며 흥행력까지 입증하기도 했다.
판타지-리얼리티 적절히 섞어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 만들고파
연출자 김윤철 피디
<내 이름은 김삼순>의 연출자 김윤철(39) 피디. 진지한 표정의 겉모습과 달리, 김선아는 그를 “삼돌이같은 감독님”이라고 놀려댄다. 20~30대 미혼 여성들을 열광케 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하니, 삼돌이같은 우직함이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런데 불리기는 ‘예술파’다. 4년전 갑자기 휴직계를 던지고, 3년여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칼아츠)에서 영화연출을 배워왔다. 그리고 미니시리즈 첫 데뷔로 ‘삼순’이를 불러냈다. “판타지와 리얼리티를 적절히 섞어, 평범한 이들이 주인공인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1991년 문화방송 입사 뒤, 96년 첫 연출작이 일요 아침드라마 <짝>이었다는 데서 갈피가 잡힌다. 유학을 마친 뒤 2003년, 외도한 남편에게 앙갚음하는 여의사 이야기를 담은 <베스트극장> ‘늪’을 만들어 이듬해 ‘몬테카를로 티브이 페스티벌’에서 최고작품상을 받았다. 만만찮은 내공에도 김 피디는 “인터넷 소설이 인기가 높았고, 종이책으로 나와서도 많이 팔려 부담스럽다”며 겸손해했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일상성과 구체성을 최대한 살려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게 만들겠다”면서도 티브이 드라마 갖는 비현실성의 한계을 인정하는 모습은 진솔하다. 98년 <베스트극장> ‘그녀의 화분, 넘버원’에서 만난 김선아를 ‘0순위’라며 캐스팅한 것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겠다는 뜻에서다.
그에겐 “배우가 대본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배우의 연기 속에 녹아든 에너지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촬영·편집의 방식이다. “장면을 뜻없이 나누지 않고, 대사의 감칠맛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면서”, 전체 신의 절반을 ‘스테디캠’으로 촬영하는 것도 그래서다. 스테디캠은 끊어지지 않게 인물을 따라가며 찍어 역동성과 긴장감은 살리면서도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림은 최소화할 수 있다. 촬영 기법에서도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김 피디의 연출법이 드러난다.
이밖에도 “장소와 연기에서도 현실감을 살리는 데” 주목하고 있다. “드라마 속 배경이 다른 로맨틱 코미디과 달리 환상적이기만 하지 않은 곳”과 “비속어를 구사하는 김선아의 연기” 등으로,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공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극적 장치는 관습적이지만 똑같은 소재도 가공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며 “김선아가 마냥 웃기기만 하진 않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