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는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콩가루 집안의 신포도 초상화 역시. 부인은 딴 남자와 눈이 맞았고, 남편은 실업자에다 퉁명스럽고 자기혐오에 빠진 10대 이야기를 처음 들어본 사람?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라는 단어 대신 그 여자, 그 남자, 사고뭉치라는 단어가 가득 찬 집의 이미지에 대해서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가 머리 위를 휙 지나가고, <아이스 스톰>의 차갑던 겨울 위에…, 음 거기다 조금만 더 써보자. 대한민국 어디쯤엔가… <해피엔드>도 있었군. 그러고 보면 이혼율 50%의 시대(적어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에 무너져가는 집이라는 것 자체가 진부한 문화적 아이콘일지도 몰라. 그런데도 <해피엔드>를 보고 <아메리칸 뷰티>를 보니 무언가 꿈틀하는 게 스쳐지나간다. 양쪽 모두 똘똘한 신인감독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라서 그런가. 가만가만. 정장을 빼입고 생계라는 미명하에 의기양양하게 차를 모는 마누라의 이미지에다 헐렁한 셔츠 차림의 오갈 데 없는 남편의 모습까지 닮았군. 애들은? 두쪽 다 모두 딸이야. <해피엔드>쪽이 젖먹이라서 그렇지. 하지만 젖먹이라도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살인에 연루되는 건 똑같은데. 그럼 누가 죽어? <해피엔드>에서는 마누라. <아메리칸 뷰티>에서는 남편. 아니아니 다 같다면서 끝이 왜 그렇게 달라? 판박이 같은 소재와 인물이 스크린 위를 왔다갔다한다고 하더니 양국의 이 ‘콩가루 집안’에 대한 유죄 평결은 왜 이렇게 다른 거야?
퇴행하는 중년, 조로해버린 10대
그건 사춘기 ‘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십대 소녀 제인이 아버지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의 짓거리를 두고 했을 말이다. 딸의 친구인 안젤라에게 반해버린 나머지 레스터 버냄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안젤라가 바라는 대로 근육질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광고회사 부장에서 햄버거가게 종업원으로 급전직하해 70년대산 빨간 스포츠카를 모는 레스터는 좋았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모든 40대 중년 남성의 심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친구의 딸인 안젤라가 서있다. 아마도 젊은 소녀에게 반해버린 중년 남자의 심리와 그로 인한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려 했다면 영화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감독은 안젤라로 나오는 미라 수바리의 관능미를 강조하고 딸과 같은 여자와 중년의 남성, ‘그들이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 된다. <해피엔드>가 그랬던 것처럼. 또한 스탠리 큐브릭의 감독의 <롤리타>에서 목격한 바처럼. 그러나 앨런 볼의 뛰어난 각본 덕으로 <아메리칸 뷰티>에는 메마른 자기혐오가 들어 있다. 때로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소적인 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빌리 와일더의 그 유명한 <선셋 대로>의 윌리엄 홀덴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연상케 하는)는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언도한다. 그는 이미 자신이 죽어버렸으며 ‘샤워중의 마스터베이션이 내 하루의 정점이다. 그 다음엔 모든 게 내리막길’이라고 하루를 내뱉듯 시작한다. 통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케빈 스페이시의 자의식은 <아메리칸 뷰티>가 표방하는 가족이란 신포도의 신맛과 단맛을 동시에 낸다.
퇴행하는 중년의 대극에는 지나치게 조로해버린 십대의 초상화도 들어 있다. 웃통을 벗은 채 아령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운동에 열중하는 레스터를 담아내는 시선은 다름 아닌 이웃집의 십대 소년 리키. 리키는 레스터의 마리화나 공급책일 뿐 아니라 레스터의 딸 제인에게 반한 나머지 레스터 가정의 일거수 일투족을 홈비디오에 담아낸다. 거칠게 인화한 홈비디오와 필름에 담긴 매끄러운 화면은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비디오의 거친 화면에서 잘 정돈된 레스터의 집은 오히려 일상에 갇힌 감옥처럼 보인다(게다가 레스터의 이웃인 호모 커플인 짐과 퇴역한 해군 대령인 리키네는 보수와 파시스트라는 정치적인 알레고리?). 레스터과 일종의 정신적인 짝패를 이루는 리키는 오히려 레스터보다 더 깊은 통찰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감독의 대리자아인 듯 보이는 이 소년은 죽은 새와 바람에 날리는 비닐 봉투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로 조숙하다. 이제 미국사회에서 세대간의 구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퇴행하는 중년과 조로한 십대의 아이들. 아들에게 애써 살아 있는 성교육을 시키려는 아버지의 노력이 순진한 애교쯤으로 비춰지는 <아메리칸 파이>의 우스꽝스러움처럼, 미국식 청춘낙서는 사라지고, <아메리칸 뷰티>에는 공멸하는 세대의 시선이 혼재한다.
잃어버린 장미의 이름
리키는 아마도 오래 전에 레스터가 가지고 있었으나 잊어버렸던 어떤 것일 것이다. 레스터는 리키가 거침없이 아르바이트를 관두는 것을 목격하고 ‘기껏해야 18살짜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감탄한다. 레스터의 딸인 제인이 리키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반면 안젤라는 레스터의 부인인 캐롤린이 한때 지녔으되 지금은 잃어버린 장미의 이름과도 같은 소녀다. 레스터는 캐롤린을 향해 ‘옥상에 올라가 헬리콥터를 향해 가슴을 드러내놓았던 그 소녀는 어디에 있지?’라고 반문한다. 가정 자체를 물질화하는 방편으로 아네트 베닝이 집을 파는 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설정도 우습거니와, 그녀가 정원에서 장미를 잘라낼 때 이웃인 짐이 탐스런 장미의 비법에 대해 묻자 ‘달걀 껍질과 미러클 농약’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캐롤린이 잘라내 레스터의 식탁을 채우는 장미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인공물, 또한 장미는 금기이자 또는 환상, 가시에 찔리면 그뿐인 실체, 그렇게도 얄팍한 아름다움 혹은 그렇게도 깊게 숨긴 비밀.
<아메리칸 뷰티>의 가장 풍요로운 시각적 상징은 이 붉은 장미에서 기인한다. 침대 가득 펼쳐놓은 장미 위의 안젤라는 이미 허상이며 꿈이다. 레스터는 장미 꽃잎 속에 손을 담그고, 그것이 모두 꿈이었음이 밝혀질 때, 장미는 핏빛 이미지이며 장밋빛 인생은 도달하면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가 되어간다. 아메리칸 뷰티는 일상사에서 느끼는 소박한 아름다움과 가장 호사스런 장미의 품종 두 가지 모두의 이름. 그러니 애초부터 안젤라는 그 누구이던 상관없었던 것이다.
여기부터 <아메리칸 뷰티>는 그 소재와 주제의 진부함의 늪을 사뿐히 넘어 서서히 다른 감춰진 비밀을 풀어낸다. 죽어가는 짐은 현실의 눈에서는 전형적인 실패자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온 머리를 피로 흥건하게 세탁한 그의 마지막 얼굴은 미소와 승리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잔상이 사라진 빈 화면으로 들리는 레스터의 목소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계속 미쳐 있기란 힘든 일이다. 보잘것없은 내 삶의 매순간에 감사한다. 좀 어려운 소리를 했죠? 하지만 걱정마세요.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천상으로 승천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이제 그가 완전히 해방된 듯 투명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뷰티>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본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잔인함의 원천은 바로 스스로에서 나온다는 것. 레스터가 자신과의 타협을 멈추고 빈 시선으로 일상을 보게 되었을 때, 안젤라는 그저 나이 어린 십대 소녀였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진다. 게이 성향을 지닌, 그러나 겉으로는 완고한 도덕주의자의 모습을 지닌 리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레스터에게 마리화나를 판 장면을 훔쳐보고 아들을 호모로 오인한 리키 아버지의 비극은 자신의 아내의 영혼을 황무지로 만들어놓고서야 끝날 수 있었다. 그에게 아들인 리키는 자신의 금지된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자신의 가장 깊숙한 두려움을 아들에게서 보았을 때, 그는 얼빠진 살인자의 속성을 드러낸다. <아메리칸 뷰티>는 서서히 콩가루 집안의 엉망진창 시트콤에서 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적인 로드 무비로 변화한다. 이웃을 훔쳐보던 은밀한 시선은 처음에는 리키의 훔쳐보기로, 그리고 리키 아버지의 감시의 시선으로 결국 레스터 자신에서 나오는 관조로 욱일승천할 때, 영화는 더없이 비상하는 듯 보인다.
<아메리칸 뷰티>를 보고 <해피엔드>를 보니
<아메리칸 뷰티>와 <해피엔드>는 똑같이 중산층 가정의 ‘무너져내림’과 가족 구성원의 ‘일탈’을 다루고 있고, 각각 아카데미가 허용하는, 그리고 한국영화의 제작여건과 관습이 허용하는 한계치를 가지고 있다. 아파트이든 미국의 중산층 교외이든 두 영화의 집안 배경은 놀랍도록 유사점을 지니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더글러스 서크류의 멜로드라마가 화려한 인테리어에 질식할 듯이 주인공을 애워싸는 반면, <해피엔드>도 <아메리칸 뷰티>의 집안도 비어서 더 공허한 주인공들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또한 감독들은 주인공들의 일상과 집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하릴없이 거리를 두는 쿨한 면에서도 비슷한다. 샘 멘데스나 정지우, 이 두 감독들은 모두 허물어져가는 가족의 모습을 그냥 건조하게 그려낼 뿐, 결코 화해의 제스처라든가, “그래도 가정은 소중한 것이야” 따위의 훈사를 늘어놓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메리칸 뷰티>가 <해피엔드>와 다른 점은 냉소적이고 건조한 시선에 덧붙여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내 옆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다 들킬 때, 그리고 자신의 삶마저 조롱하는 듯한 레스터의 독백이 성숙한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이고 카메라가 다시 그들이 살던 마을을 비출 때, <아메리칸 뷰티>는 <해피엔드>와 매우 다른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해피엔드>에도 비상을 향한 여린 몸짓은 있었다.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 남자는 화장실에서 아내의 사진을 태우며 엉엉 울고, 꿈인지 생신지 아내는 하늘로 올라가는 노란색 근조등에 잡을 듯 말 듯 손을 내민다. 그러나 이 아스라한 마지막을 위해 감독이 깔아놓은 포석은 끝내 한국적인 그리고 가부장적인 답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아이의 우윳병에 수면제를 넣는 여자의 무모함과 금지된 욕망을 사랑과 혼동하는 불륜의 격렬함은 마지막 장면의 감독의 의도를 완전히 희석시킨다. 그래서 <해피엔드>의 마지막은 마치 질문도 안 했는데 미리 답변을 토해내 선수치는 자기 방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지우가 <아메리칸 뷰티>를 찍었다면?
이쯤해서 필자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정지우 감독에게 누가 <아메리칸 뷰티> 같은 각본을 주고 스필버그가 운영하는 드림웍스 밑에서 영화를 찍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실 연출력에 관한 한, 정지우 감독이나 샘 맨데스 감독이나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해피엔드>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그토록 잔인한 살인 외에는 어떤 방도도 없이 타협없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것은 가히 행복함에 대한 성찰이 함량미달인 치정극으로 끝난 것이다. 반면, <아메리칸 뷰티> 역시 결점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름다움에 관한 쓰디쓰면서도 여유있는 유머가 깃들어 있다. 돌발적인 주인공의 죽음조차도 냉소적이지만 희미한 온기를 담아낸다. 행복없음에 방점을 찍는 치정과 그래도 아름다움을 잡아내는 쓰디쓴 유머의 차이. 혹시 그것은 외부의 관조자와 아무리 냉정해지려 해도 언젠가는 자기의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내부의 당사자라는 차이가 빚어낸 결과는 아닐는지. 샘 멘데스가 영국인 감독이어서일까? <아이스 스톰>이 그러했듯 미국의 가족 초상화에 관한 가장 뛰어난 수작 두편이 한 사람은 중국 감독, 한 사람은 영국 감독이란 사실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렇게 놓고보니 이방인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해피엔드>에는 없는 까닭을 알 듯하기도 하다. 남의 얘기하듯 하는 내 이야기가 때로는 더 귀에 잘 들어오는 이상한 일 말이다. 두 영화 모두에 치정은 있다. 그러나 치정을 치정으로 보는 시선과, 심각해야 할 치정 자체를 조롱하듯 끝내는 두 감독의 시선에는 한국과 미국, 내부자와 국외자라는 간격 이상의 그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차이가 시각과 여유로움의 차이일 뿐, 최소한 완성도의 결정적인 격차가 아니라고 위안하는 데서, 그래도 한국영화의 현실을 안심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