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처럼 괴팍한 취향을 가진 한량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의외로 <차이나타운>을 쓴 사람이 로버트 타우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꽤 된다. 거의 모든 시나리오 작법서에서 이 작품을 ‘시나리오의 교과서’로 꼽고 있는 까닭이다. 과연 양파껍질 벗기기와 미로찾기로 점철된 플롯에는 묘한 흡인력이 박동하고 있고, 캐릭터의 묘사와 주제의 울림 또한 핍진하기 이를 데 없는 명품이긴 하다. 졸역서인 <시나리오 가이드>의 표현을 빌리면 “단순한 스토리를 매우 복잡 미묘하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냄”으로써 시나리오란 곧 “작가와 관객이 함께 벌이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걸작이다.
타우니는 <차이나타운> 덕택에 전세계 시나리오 작가(지망생)들 사이에서 흠모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이런 지위와 명예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냐고? 그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리고 그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오직 배우로서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 택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이 배꼽잡는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아무래도 그의 서러운 행자(行者)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LA 출신의 영화 청년이었던 타우니가 영화이력을 시작한 것은 저 유명한 로저 코먼 밑에서 였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그의 저서 <나는 어떻게 100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로저 코먼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을 초월하는 저예산으로 온갖 잡동사니 영화들을 양산해낸 ‘미국 B급 영화의 아버지.’ 아무 역이라도 좋으니 제발 배우만 시켜달라고 연일 통사정을 하던 타우니에게 코먼은 말한다. “시나리오만 써와, 그럼 너를 주연으로 캐스팅해줄게.” 그렇게 해서 탄생된 타우니의 최초 시나리오이자 최후 주연작이 <지상의 마지막 여인>. 인류멸망 이후 한명밖에 남지 않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두 남자가 결투를 벌이는 황당무계한 영화인데, 여기서 타우니가 보여준 연기는 형편없다 못해 그야말로 컬트적(!)인 수준이어서 보는 사람들마다 배를 잡고 굴렀다고 한다.
이쯤에서 코먼은 그와의 인연을 접고 싶었겠지만 타우니는 달랐다. 오직 시나리오만 쓰면 배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미친 듯이 시나리오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렇게 코먼 밑에서 “마당 쓸고 물 길어오며” 보낸 행자생활이 10년. 타우니로서는 시나리오만 달랑 빼앗아 다른 배우에게 맡기곤 했던 코먼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겠지만 그러는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훗날 그를 ‘시나리오 작가의 대명사’로 불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집필실력이 급성장한 것이다. 코먼 밑에서 썼던 작품들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빌라 라이즈>. 본래 이 영화의 감독으로 내정돼 타우니와 함게 시나리오를 썼던 사람은 샘 페킨파였다. 그러나 훗날 ‘폭력의 피카소’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페킨파도 이 서러운 무명 시절에는 주연을 맡은 율 브린너의 전횡 때문에 감독직에서 쫓겨나 보따리를 싸게 되니… 거장들의 수업시대도 피눈물 난다.
이후 타우니가 썼던 작품들은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들 뿐이라 필모그래피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 싶다. 타우니는 현재 할리우드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스크립트 닥터(script doctor)’로 손꼽힌다. 평균 10여차례의 수정작업을 거쳐 촬영대본(shooting script)이 나오고 그것을 다시 콘티(cutting continuity)로 고칠 때 마지막으로 개입하여 가필(additional writing)하는 것이 스크립트 닥터의 임무. 이런 식으로 크레딧은 남기지 않았으되 그의 손끝을 거쳐간 시나리오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대부>(1972) <레즈>(1981) <딕 트레이시>(1990) <아마겟돈>(1998) 등이니 할리우드에서의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아무래도 시나리오 작가만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든지 직접 연출한 작품은 세편. 데뷔작인 <퍼스널 베스트>(1982)만 빼고 나머지 두 작품 <불타는 태양>(1988)과 <톰 크루즈의 위다웃리밋>(1998)은 모두 국내에 출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