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밤새 타오르던 에너지가 수그러든 홍익대 클럽거리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김혜수를 만났다. 길거리로 훤하게 열려 있는 자리가 불편할까 염려되어 밀폐된 좌석으로 옮기기를 청하자 돌아오는 무심한 대답. “괜찮아요. 여기 시원하고 좋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해하는 것은 김혜수가 아니라 소심한 기자들이다. <분홍신>에서의 모습 그대로, 그는 금방 감아서 아무렇게나 말린 듯한 짧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슥슥 흔들어댔다. 욕망하는 여자들의 다리를 썩둑 자르는 분홍신의 저주에 사로잡힌 위태로운 눈동자는 없다. 대신 동공을 채운 것은 김혜수다운 무경계 팽창 에너지. 그는 (받아 적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똑 부러지는 말투로 연신 “즐겁다! 나 요즘 너무 좋다!”를 외쳐댔다. 내년이면 연기생활 20년을 맞는 김혜수는 그 언제보다 최상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다. 30도가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 속에 진행된 프레시(Fresh)한 여배우 김혜수와의 긴 대화.
“다른 매체를 통해서 김혜수라는 배우의 밝고 명랑함, 당당함, 자신감을 봐왔는데, 상당히 어두운 면도 있었고, 섬세하고 예민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 배우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스펙트럼, 어떤 풍요로움을 여태껏 많이 보여주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쓰리>의 김지운 감독, 2001년 12월18일 <씨네21> 331호 인터뷰 중-
-얼마 전 <얼굴없는 미녀>로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축하한다.
=오랜만에 받은 상이다. <첫사랑>과 <닥터 봉> 이후로 주연상은 처음이니까. 원래 상 자체에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닌데, <얼굴없는 미녀>는 참여한 사람들이 마음고생을 특별히 많이 했기 때문에 기뻤다. 20여년을 일해도 ‘영화는 피눈물’이구나 하고 처음 느낀 영화였으니까.
-<얼굴없는 미녀>를 끝내고 배우로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촬영이 종료하면 곧바로 역에서 빠져나오는 편이다. 억지로 몰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얼굴없는 미녀>는 끝나도 처음으로 돌아오지가 않더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몰입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안 되더라. 영화 끝나고도 계속 내가 그런 무드로 살게 되니까 점점 불안해졌다. 매니저도 ‘누나 이상해요. 다른 거 해야지 안 되겠어요’라며 걱정하고. 그래서 일상적 캐릭터(<한강수 타령>)를 재빨리 선택한 거다.
-그리고 <분홍신>을 선택했다.
=전작이 워낙 무겁고 어두운 캐릭터여서. 주위에서도 다들 다음에는 좀 가벼운 걸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호러영화를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원래 호러영화는 프로포즈(섭외)도 잘 안 들어오고. 그런데 <분홍신> 시나리오가 왔다. 시나리오가 참 괜찮았는데 상업적인 호러영화로 만들어지기에는 테마가 좀 어렵다 싶었다. 감독이 궁금해서 직접 만나봤더니, 원래 감독들이 배우보다도 개성이 더 강한 인간들인데(웃음), 김용균 감독은 그게 하나도 눈에 안 띄는 게 특이했다. 그런데 그게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았다. 현실에 발을 딱 붙이고 있는 사람. 좋게 말하면 너무나 영화적이고,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적 허영이 전혀 없다는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됐다.
-감독을 만날 때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은 뭔가.
=다 다르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이끌려서, 설명할 수 없는데도 그냥 확신이 가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럴 때는 그냥 선택해버린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음, 아마도 이번 케이스가 그런데, 김용균 감독은 부풀려진 것들을 상당히 견제한다. 그래서 나와 잘 맞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부풀려진 연기를 보완하거나 견제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배우로서 김혜수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결점에 대해서 좀 다른 시각으로 신랄하게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치명적 결점이라고.
=<신라의 달밤>을 예로 들면, 나는 사실 코미디 연기에 별로 자신이 없다. 그런데 밝고 외향적인 이미지 때문에 제의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취향은 코미디가 아니다. 그래서 코미디 연기할 때 부담이 많다. 게다가 연기가 잘 안 풀리는 경우 정말로 전형적인 연기를 하게 된다. 그 모습이 너무 싫고, 배우로서 너무 괴롭다. 사실 어떤 배우들이나 연기가 함정으로 빠질 땐, 김혜수가 하든, 전도연이 하든, 전지현이 하든, 그 어떤 여배우가 하든 똑같은 연기가 나온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게 남들보다 심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아주 치명적이다.
“예전에는 좋은 작품, 좋은 캐릭터, 좋은 감독, 이런 것보다는 그냥 사람들하고의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배우고 지내는 것에 의미를 뒀어요. 그런데 이제는 좀 태도가 달라졌어요. 그 활발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연기자로서 좀더 의미부여하고 싶어졌어요.” - 2002년 8월20일 <씨네21> 365호 인터뷰 중-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땠나. 기억은 나나.
=내가 연기를 갓 시작했을 때는 굉장히 순수했던 것 같다. 기술적으로 캐릭터를 만드는 그런 건 몰랐다. 그저 느껴지는 대로 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은 내 스스로가 너무 생각이 많아졌다. 연극영화과 가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론부터 배우는데, 그건 본능을 통제하고, 자기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굳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억지로 하는 거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게 다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냥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는 것 같다. 똑같은 느낌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보려고 한다. <분홍신>을 하면서는 나도 그걸 원했고 감독도 그걸 원했다. 요즘은 가급적이면 생각을 줄이고 본능에 맡기려 한다. 외국에서 영화공부하는 친구가 “배우는 ‘노!’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 배우는 시키면 뭐든지 해야 한다고. 그의 지론이 이제는 내 지론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역배우였던 예전으로 리턴한 느낌 같은 건가.
=나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스스로의 재발견이다. 정말로 예전으로 리턴한 느낌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 않나.
=그거야 물론 차이가 있다. 이제는 나라는 배우가 순도 100% 순수하지만은 않으니까. 김용균 감독도 처음 만났을 때 “설사 좀 틀리더라도 본능적으로 반응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친구도 내가 너무 생각을 많이 한다더라. 그럼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어떤 특별한 비법이 있나? 사람들이 날더러 연기 못한다고 하는데, 분명 경력과 대비해서 어떤 지점부터 정체된 것 같더라. 하지만 노력을 이렇게 하는데도 왜 여기에만 머무를까? 난 정말 가능성이 없는 애인가? 재능이 부족한가? 매너리즘과는 다른 느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답답한 마음에 매니저에게 같은 소속사 배우들에 대해서 물어봤다. ‘자기야, 도연이는 배역 준비를 어떻게 해?’(웃음) 매니저가 전도연은 그냥 역에 빠지는 거 같다고, 무지하게 치열하고 감독을 괴롭히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근데 그건 나와는 너무 다른 거라서 그러지는 못할 것 같고. 어쨌든 다른 배우들이 현장에서 어떤지 계속 관찰을 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너무 나 자신에게만 몰두하다보니 관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관찰을 한다고 해서 새로운 엄청난 걸 발견하진 않겠지만, 스스로 리프레시(Refresh)되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여유도 생긴 것 같다. 너무 좋은 것 같다. 나 요즘에 너무 좋다. 꺄아(비명과 함께 웃음).
“단 한번도 억지로 만들어서 연기했던 적이 없다. 연기자 생활 1∼2년 할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작위적인 변신은 사양한다.” - 1998년 2월10일 <씨네21> 137호 인터뷰 중-
-솔직히 <얼굴없는 미녀>와 <쓰리> 이후에 호러영화에 도전하는 게 좀 신경쓰이지는 않았나.
=누누이 말하지만 <얼굴없는 미녀>는 본격 호러가 아니지 않나. 음, 장르를 솔직히 모르겠는데. 마케팅이 지나치게 발전하다보니 역효과가 있는 게, 항상 마케팅하는 영화들의 장르를 꼭 한 가지로 국한해서 보이려고 하더라. 그런 거 정말 싫다. 장르라는 게 불분명할 수도 있지.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영화를 머릿속에서 구분하나.
=되게 쉽다. 대본에 있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다가가면 된다.
-음, 쉽네. 마음 가는 대로라. 마음 가는 대로 구분하는 데 감독의 도움이 좀 있었나.
=감독이 여자는 아니니까 잘 모르는 게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집에 가서도 내내 영화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내 의견이 활용도 많이 되었고. 뭐, 다른 배우가 했으면 다른 컬러로 갔을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에서 의견을 낸 건가.
=나한테는 무서운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거울 보고 아기 목소리를 흉내내는 장면, 애랑 엄마랑 같이 목욕하는 장면. 그건 내가 주장해서 들어간 장면이다. 왜냐하면 주인공 두 사람의 관계는 엄마와 딸이지만 결코 일상적인 모녀는 아니니까. 정서적으로도 약간 이상하게 엮여 있는 모녀의 느낌이 비주얼로 필요할 것 같다고 여겼다. 그리고 분홍신. 영화 속에서 분홍신은 여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엇이다. 그런데 보통 남자들이 그러잖아. 나 너 좋아하지만 쇼핑을 좋아하는 건 이해가 안 돼! 이 여자는 냉장고에 먹을 게 꽉 찼는데 또 장을 보네! 남자들은 늘 ‘껍질을 다 버려! 난 너 자체가 좋아!’. 하지만 여자들은 이것, 분홍신이든 물건이든, 이것 역시도 나라는 거다. 대충 무슨 이야기인 줄 알겠나?
-음, 대충… 뭐. 그래서 당신도 구두를 모으나.
=구두 많다. 배우니까 구두 좋아한다. 그래도 그렇게 비싼 구두는 없다. (웃음)
-여하튼 말 들어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을 듯도 하네. 김용균 감독도 섬세하긴 하지만 남자니까.
=바이섹슈얼이 아닌 다음에야 여자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걸 아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거지. (웃음) 그래도 김용균 감독은 남자치고는 많이 섬세하고, 여성성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점이 나랑 조합이 잘 되면서 서로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럴 때 정말 보람이 있는 거 아닌가. 관객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면 더 좋은 거겠지만, 작업과정이 배우에게는 전부니까. 흥행이야 보너스이고. (웃음) 졸작을 하건 뭘하건 나로서는 할 만큼 다 한 것이니까 억지로 더 잘하려고 하진 않는다. 예전에는 그러려다가 너무 부작용이 많더라. 이번에는 가진 것에서 최선을 다한 만큼 후회는 없다.
-마지막 대구 지하철역에서 찍은 클라이맥스 장면은 3일 동안 탈진하면서 찍었다고 하던데. 당신 얼굴이 귀신보다 더 무섭더라.
=감독도 내 얼굴만 가져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다. 그래도 귀신 나오는 장르영화로서 과감하게 가져가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회적으로 어른대접을 받았지만 내면은 어린애였으니까. 사춘기를 겪지 않고 어른이 된 아이라고 할까. 철이 늦게 들었던 거죠. 그뒤로 일반 사람들과의 갭을 줄이려 했어요. 일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이게 내 전부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나름대로 자부하는 건 연기생활 11년간 일단 약속한 것은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 1998년 2월10일, <씨네21> 137호 인터뷰 중-
-요즘 싸이월드 한다면서? 하루 접속자가 엄청나더라.
=그거 정말 재미있더라! (웃음) <얼굴없는 미녀> 때 우리팀에 자료 띄울 게 많아서 누가 만들어준 싸이였는데,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한강수 타령> 하면서 시작했다. 직접 찍은 사진도 올리고 하는데, 남들이 좋아하니까 나도 덩달아 재미를 붙여버렸다. 그걸로 연락끊긴 친구도 찾고, 오래 메모 주고받은 친구들 중에 영화나 음악이나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고. 요즘은 조잡한 스킨 만들어서 음악까지 셋업하면 너무 뿌듯하다. (웃음)
-그걸로 어린 팬들도 많이 늘었겠다. 애들은 당신 잘 모르지 않나.
=그렇지. 저 섹시한 척하는 아줌마는 뭐냐 대체! 이렇게 생각해왔겠지. (웃음)
-요즘 인터넷 돌아다니다보니 당신 옛날 아역 시절 사진을 보고 감탄하는 어린 팬들이 많더라.
=그게 너무 재미있다. 또 나와 같이 성장해온 세대의 사람들도 많다. <깜보> 때부터 지켜보고 있으며 늘 마음으로 응원한다, 이런 글을 보면 너무 감동해서 답장도 다 해준다. 우리 세대와 요즘 젊은 세대가 너무 다르지 않나. 요즘 애들은 익명으로 거리낌없이 스타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수줍게 브로마이드 모으고, 문방구에 사진 코팅하러가고. (웃음)
-김혜수라면 80년대 가장 인기있었던 책받침 코팅 모델 아니었겠나.
=언니보다 나이는 어린데 저는 벌써 자식 낳고 키우고 있어요. 그런데 언니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이런 답글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김혜수라는 배우가 원하는 것들을 표현하며 사는 걸 보는 게 큰 자극이 된다더라.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말 들으면 참 좋다.
-그 정도로 의미를 느끼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유명인사여서 일반인들과의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 아닌가.
=분명히 그런 게 있다.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하면 정서나 생활, 특히 일상성이 불균형하다. 내게는 이 직업이 중요하고 특별한 일이었지만, 일상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분명히 있었다. 언제냐면, 아마도 20대 중반쯤 그런 걸 느끼기 시작했나보다. 일상적으로는 내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한없이 떨어진다는 걸 느끼는 경우들. 예를 들어 세금고지서 처리나 은행업무도 혼자 못하는 순간들 말이다.
-사춘기가 언제였나.
=나는 그런 거 없는 줄 알았다. (웃음) 내가 성격이 무던해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아주 늦게, 대학교 2∼3학년 때 왔다! 잠자리에 누워서 천장을 보면, 아아 내 인생 어디로 가나. 난 누구인가.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고. 그땐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억지로라도 해야 할 일이 너무 확실해서 갑갑했다.
-그럼 그럴 땐 바라보고 연기할 수 있는 모델은 없었나.
=없었다. 어쩌다가 연예인으로 발탁된 거라 모델 같은 게 없었다.
-모델이 없어 답답한 적은 없나
=가끔 그런 질문을 받긴 하지만, 좋아하는 배우는 있어도 모델은 없다. 그러니까 답답한 줄도 모른다. (웃음)
-그래서 안 지치고 연기를 계속하는 것도 같다.
=취미도 마찬가지다. 며칠 동안 계속 밤새서 혼자 음악 다운로드받기도 하고. 자료 같은 거에 꽂히면 무조건 다 수집한다. 수집벽이 있다. 옛날 옷이나 소품 같은 것들도 모으고.
-그런 건 E-bay(인터넷 옥션 사이트)에서 사나.
=아! 거기는 항상 상주해야 한다. 죽을 만큼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는 방법 알려줄까? 이건 비밀인데….(비밀이라서 생략)
“10년 뒤의 모습? 모르지 뭐. 내가 보기엔 괜찮을 거 같다. 지금보다 훨씬 멋있어져 있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건 발전하는 인간이 되는 거고, 나이를 괜히 먹지 않는다면야 내 내면이 더 훌륭해지기를 바란다.” - 1996년 12월24일, <씨네21> 83호 인터뷰 중-
-대가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은 없나.
=부끄럽게 욕망은 무슨. 뭐 그분들이 원한다면 검토를 한번 신중히 해보도록 하지. (웃음)
-그래도 원톱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한명 아닌가.
=그런 것에 신경쓰지는 않는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과 일하고 싶거나, 배역이 마음에 든다 싶으면 (손가락 끝을 가리키며)요마∼안∼한 역이라도 절대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안 믿어주더라. 난 정말 그런데. 일반적 욕심과는 다르다. 욕심이 있기는 하지만 독보적으로 돋보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렇게 살면 본인도 힘들걸. (웃음) 아, 요즘 나는 욕심 다 버리고 정말 재미있게 한다니까! 왜 안 믿어주나. 힘든 시절은 이미 많이 보냈다. 예전에는 일을 즐기면서 한다는 느낌까지는 못 가졌던 것 같다. 재미있다와 즐긴다는 좀 다른 거 아닌가.
-내년이면 연기생활 20년이다. 개인적으로 20주년 기념 이벤트 할 생각은 없나? 패티 김처럼.
=사실 우리나라는 겸손이 미덕이라서, 그렇게 자축하는 건 색안경 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네가 아무리 20년을 연기했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기대치에는 부응 못하걸랑! 이런 시각이 있는 거다. 대외적으로 김혜자 선생님도 안 하시는 거 드러내놓고 내가 할 순 없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자축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있다. 스스로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그런 걸 하는 거다. 난 그런 마음 없을 줄 알았는데, 약간은 있더라니까. (웃음)
-앞으로가 정말 볼 만하겠다. 연기생활 20년 만에 이제야 마음도 편하고 재미도 있다니까.
=사는 게 재미있는 것 같다. 나한테는 사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이 되게 중요하다. 나는 인생을 행복/불행, 만족/불만족으로 나누고 사는 게 아니라 재밌다/심심하다로 나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는 주욱 그렇게 살려고. 음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