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4월2일, 한국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 사람인 장동휘가 죽었고, 모든 미디어가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4월13일, 위대한 장인 이만희 감독이 30주기를 맞았고, <씨네21> 같은 영화전문지를 포함한 어떤 매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어떤 젊은 한국 감독도 임권택과 대결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 사실만으로 간단한 가설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 한국영화의 과거는 한국영화가 아니라 미국영화이거나 유럽영화이거나 일본영화다(혹은 한국영화에는 임권택과 한국영화라는 두 부류가 있다).
그럴듯한 가설이다. <올드보이>는 쿠엔틴 타란티노 스타일의 변주로 수용되고, <달콤한 인생>은 필름 누아르 그것도 프렌치 누아르의 계보에 편입되려 하며, <남극일기>는 은연중에 구로사와 기요시를 불러온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아니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된다(계열은 다르지만 홍상수는 종종 유럽 모더니즘의 후예로 간주된다). 사정이 그렇다면 아드리앙 공보의 “한국영화에는 앞선 역사와 대결하기보다는 그것을 흡수하는 탈연대기적인 역사가 존재한다”라는 확신은 잘못된 관찰일 것이다. ‘탈연대기적인 역사’라는 말은 ‘망각의 연대기’로 대체돼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만의 유전자는 존재하나
물론 이건 가치 판단의 문제는 아니다. 앞선 역사와 대결하거나 흡수하거나 망각하는 건 한 사람의 예술가에겐 결국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과연 그런가 하고 물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정말 한국영화는, 임권택을 제외하고는, 199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미국영화와 유럽영화와 일본영화의 기억을 안고 새로 시작한 것일까? 이 질문은 쉽게 답해질 수 없겠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외국 평자들의 시선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우리가 한국영화의 비교와 평가의 준거를 미국과 유럽과 일본에서 애타게 찾고 있을 때, 그들은 종종 한국영화만의 고유한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5월19일 ‘서울 디지털 포럼 2005’에 참석한 <할리우드 리포터> 발행인 겸 편집장인 로버트 다울링은 “<올드보이>는 한국인만의 감성과 사고, 한국적인 스토리텔링이 반영된 영화이며 이런 영화는 미국 감독이 결코 만들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한국적인 스토리텔링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평이 설명의 일부를 대신할지 모른다. “<올드보이>는 감정의 극한까지 밀고가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흥미를 위해 존재하는 스릴러들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액션이, 매우 폭력적이라 해도, 이야기를 만들고 목적을 품은 영화를 만나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물론 이런 유의 논평은 얼마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멀리 있는 관찰자들은 흔히 관찰 대상의 고유성을 절대화하거나 신비화하려는 관성을 지닌다(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런 관점을 비판하며 오즈 야스지로를 포스트모던한 작가로 재해석한 바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장 미셸 프로동은 “<오! 수정>이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며,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배웠다”고 썼다. 이 명민한 프랑스 평론가조차 우리가 가장 탈지역적이라고 생각해온 홍상수 영화에서 일종의 지역 민속지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여하튼 만든 사람이나 자국 평자들은 세계영화의 연대기에 편입되기를 소망하고, 외국 평자들은 같은 영화를 놓고도 지역적 고유성이라는 컨텍스트에 집착하고 있는 사실은 여전히 흥미롭다.
아마 정답은 양자 사이의 어디쯤에 있거나 양자에 걸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 스토리텔링은 얼마간의 무리를 감수라고라도 짚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대중영화의 탈지역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스토리텔링이 오늘의 한국영화와 옛 한국영화가 공명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국내 논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올해 초 프랑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영화의 힘은 사춘기의 젊은 힘이 내뿜는 열정과 에너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비슷한 맥락의 ‘한국영화의 소년성’이라는 글을 지난해 초 <씨네21>에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수정과 보완의 필요성을 느낀다. 여기선 한국적 스토리텔링과 관련된 몇 가지 가설을 말하려 한다.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첫 번째 특징
-장르적 페티시즘의 탐닉
로저 에버트의 말을 상기해보자. 그는 “액션이 이야기를 만들고 목적을 품은 것 자체가 충격”이라고 했다. 어떤 액션이나 스릴러에도 이야기가 있고 일정한 동기화가 있다는 점에서 그의 표현이 명료한 건 아니지만, 그는 <올드보이>에서 격렬한 장르적 페티시즘과 전통적 드라마 혹은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결합 혹은 이접(離接)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게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 점은 장르적 페티시즘만으로 이루어진 <킬 빌>과 비교하면 뚜렷해진다.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을 처치하기 위해 달려드는 80여명의 야쿠자들이 총을 쓰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묻지 않는다. 이 영화에선 칼의 동선과 그 칼로 잘려나가는 신체의 형상이 페티시즘의 중요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 브라이드’는 처음부터 장르의 계열 안에 들어와 있는 인물이었지만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장르의 계열 밖에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소시민이었다. 여기서 히치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올드보이>의 페티시즘이 훨씬 더 양식적이고 과격하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오대수의 장르적 세계에로의 진입은 순전한 불운이 아니라 스트레이트 세계에서의 뜻하지 않은 실수 때문이라는 점이다. 두 계열 자체가 단단한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격렬한 장르적 표현이 감각적 쾌락에 머무르지 않고 격렬한 감정을 동반하는 것은 그것을 리얼리즘의 확장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효과다. 오대수가 동시에 스트레이트 계열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장르 계열에서 벌어지는 그의 고통과 비극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강한 동일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우리는 ‘더 브라이드’의 불행을 비통해하진 않는다).
물론 그 효과는 두 이질적 계열의 매우 정교한 배열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배열에는 딜레마가 따른다. 장르적 페티시즘은 종종 과잉 이미지를 지향하므로, 그 원인이 되는 스트레이트 세계에서 아주 강렬한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적어도 한 사람 이상 부당하게 그리고 무참하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수록 장르적 이미지는 더욱 강렬해져야 한다. 그 결과 장르적 이미지는 자주 스트레이트 스토리 위를 흘러넘친다. 그 때문에 한국 대중영화에는 인과의 불균형, 주로 결과 비대증이라는 내러티브상의 부작용이 종종 드러난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올드보이>가 택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입구와 출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올드보이>는 현대 소시민의 일상에서 출발했으나, 마지막엔 아득한 설원에 도달해 있다. 일상적 공간에서 신화적 공간으로의 이 이동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 계열이 극히 정교하게 배열돼 이음매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쇄살인 장르에 역사적 사건을 접합한 <살인의 추억>은 페티시의 대상을 최소화하고 이야기의 틈새를 촘촘히 채움으로써 불균형의 위험을 피해나간 사례다.
<주먹이 운다>는 불운한 가장과 버림받은 청년의 삶을 전통적 드라마로 전시한 뒤에 육체적 충돌의 전시장으로 이끈다. 여기선 스트레이트 스토리가 너무 강해서 대단원의 육체적 격돌은 그 매혹이 반감된다. <남극일기>는 탐험대장의 광기를 자신의 무대 안에서가 아니라 아들을 잃은 그의 개인사에서 끌어온다. 이 영화의 경우엔 대장의 개인사에까지 장르적 요소를 주입한 나머지(대장의 아들은 귀신을 보았다고 한다), 공포 효과들의 평면적인 전시장이 되고 말았다. <혈의 누>는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연쇄살인범 장르에 역사적 사건을 인과의 연쇄로 포섭한 영화다. 여기선 피살자들의 끔찍한 형상의 강도는 범인의 극히 낭만적인 동기의 강도를 훌쩍 넘어선다. 스트레이트 서사의 인간적 분노와 증오가 살인방식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장르적 페티시즘에 가려버린 것이다.
오직 장르적 시공간 안에서만 펼쳐지는 <달콤한 인생>이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메타적인 논평을 품고 있다. 선우(이병헌)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보스를 찾아가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라고 울먹이며 묻는다. 그는 묻기 전에 답을 알고 있다. 보스의 여자를 탐했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은 다른 영화와는 정반대로 드라마와 캐릭터의 두께를 거의 지워버리고 장르적 페티시에만 몰두한다. 선우의 질문은 영화의 페티시즘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장르적 자명성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두번째 특징
-도덕적 자의식에 의한 마조히스트적 결말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특징은 그 배열이 종종 마조히스트적인 결말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영화들의 대부분이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성공한 대중영화들의 대부분이 주인공의 자살 혹은 자학, 적어도 고립과 패배에 이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여기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흔히 비도덕적으로 흐르기 십상인 페티시즘에 대한 자책으로서의 자기 징벌이다. 타란티노처럼 피와 손상된 육체를 쾌락의 대상으로 전시하고 나서 웃거나 승리하는 결말(<펄프 픽션>의 그 뻔뻔스런 시체처리인과 살인범들을 떠올려보라)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엔 도덕적 자의식이 작용한다.
두 번째는 공동체로부터의 탈주욕망과 관계가 있다. 한국 대중영화에서 공동체를 근심하는 주인공이 드문데도, 자신의 공동체를 유쾌하게 탈출하는 주인공은 더욱 없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공동체는, 벗어나고 싶지만 이데올로기의 효과 혹은 또 다른 도덕적 강박증으로 인해 탈주가 불가능한, 말 그대로 악몽이다. 남은 길은 공동체의 희생양이 되어 소멸하는 길이다. 이 대목에서 소년성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이 묵인되고 자살 혹은 자학이 동일시를 통해 비극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고 있지 않으나 성숙한 육체가 필요하다(그 주체가 어린이라면 관객은 동일시가 아니라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버림받거나 소멸하는 소년은 죄의식과 탈주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이며, 이제 고통받는 소년의 육체 자체가 페티시의 대상이 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특성들은 21세기 한국영화를 서구적 의미에서 영화광의 시대라고 말하는 데 망설이게 하는 요소다. 앞선 역사에 대한 망각과 표면적 탈지역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영화는 어떤 층위에서든 한국영화의 전통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르적 페티시즘 탐닉과 그 탐닉을 제어하는 리얼리스트적 혹은 도덕적 자의식의 기묘한 공존은 1980년대 후반에 한국영화에 도래해 한 세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정신의 굴절된 유산이 아닐까. 나아가 리얼리즘의 계율은 60년대 문예영화 시대부터 그 외양을 달리하며 전승돼온 한국영화의 가장 강력한 유전자가 아닐까. 혹은 마조히즘적 결말은 옛 한국영화의 독소로 치부됐던 그러나 이영일 선생의 통찰에 힘입어 그것의 해방적 기능이 재조명되고 있는 신파성의 현대적 변용은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신중해야 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국영화에 “앞선 역사와 대결하기보다는 흡수하는 탈연대기적 역사가 존재한다”는 관찰은 여전히 유의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