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에서는 <분홍신>의 기자 및 브이아이피 시사회가 열렸다. 개봉을 사흘 앞두고 촉박하게 열린 시사회 현장에서 주연 배우 김혜수 일행의 일정을 따라가봤다.
데뷔 20년, 영화만 16편을 찍은, 늙지는 않았지만 노회한 톱 배우의 ‘가장 바쁜’ 어느 하루를 좇는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 아니나 다를까 메이크업 전, 긴장과 기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맨 모습부터 취재를 시작하겠다는 요청은 일찌감치 거절된 상태다.
기자 시사회가 예정된 오후 2시를 5분 넘긴 시간, 시사회장 바로 옆에 인터뷰 장소로 마련된 아이스크림 전문점. 어깨선이 눈부시게 드러난 은회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김혜수가 매니지먼트사 일행 6명과 함께 나타난다. 곧바로 방송 3사의 인터뷰 카메라 앞에 선 김혜수는 5분간의 짧고도 굵은 인터뷰에 들어간다. 인터뷰 직전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다급하게 콘텍트렌즈를 찾던 그였다. 하지만 채 ‘눈’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큰 눈으로 자연스레 카메라를 응시한다. 노련하다.
“콘택트렌즈 좀 주세요”
그는 잠시 숨 고를 틈을 타 황급히 콘텍트렌즈를 받아 꼈다. 2시15분. 김용균 감독의 팔짱을 낀 김혜수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첫번째 상영관 스크린 앞에 등장한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지만 기자들을 향해 인사말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또다른 상영관으로 이동하는 짧은 순간, 상대 배우 김성수를 향해 “자기, 왜 이렇게 멋있어?”라는 농담섞인 칭찬을 건넬 정도로 여유가 넘친다.
두 시간 뒤, 기자들과 함께 <분홍신> 관람을 마친 김혜수는 곧바로 기자 간담회를 소화해낸다. 그는 “객관적 시각을 잃은 상태라 객관적으로 영화를 보기 어려웠다”면서도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또박또박 거침없이 풀어낸다. “떨리지 않느냐,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리 준비했느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을 넘었고, 일(배우)을 몇 년을 했는데, 언제 어느 때고 내 생각 정도는 말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어지간한 배우들이 굳이 챙겨보지 않는 기술 시사까지 챙겨 볼 정도로 자기 영화에 대해 생각이 많고 애정이 많은 그에게, 괜한 질문을 던졌지 싶다.
기자간담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경제지와 인터뷰가 시작된다. “영화 어때요?” 질문을 시작하는 건 오히려 김혜수다. <분홍신> 속 한 장면에 대해 “너무 무서웠다”는 기자를 향해 “그거 내가 제안한 장면인데”하며 어깨춤을 추는 김혜수. 이 사이 매니저는 정신없는 스케줄 때문에 물 한 모금도 못마셨다는 김혜수에게 아이스크림과 패스트푸드를 사다 나른다. 두 명의 기자가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부었지만, 이 노련한 배우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패스트푸드를 입에 넣으며 마치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 듯 청산유수다.
“한장만 더” 초대권 쟁탈전
5시50분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차 안으로 몸을 피한 김혜수에게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김혜수는 “꽉끼어서 숨을 쉬기도 불편했다”는 은회색 원피스를 나풀거리는 검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의자에 몸을 뉘인다. 하지만 이내 또다시 방송 연예 프로그램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시사회 전 한국방송의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까지 합하면 이날 하루만 다섯번째, <분홍신> 촬영이 끝난 5월20일 이후 벌써 서른번째가 넘는 인터뷰다. 하지만 김혜수는 마치 첫번째 인터뷰에 응하듯, 새롭고 활기찬 표정과 몸짓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같은 질문을 세번만 해도 싫증이 밀려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기자인 나는 이 배우의 노련함이 그저 놀랍고 소름끼친다.
김혜수가 인터뷰에 여념이 없는 사이, 그의 ‘분신’인 매니저는 제작사 관계자와 입장권 쟁탈전을 벌인다. 마당발 김혜수가 ‘싸이월드 쪽지’와 ‘초대권 발송’ 등을 통해 초대한 지인들의 브이아이피 시사회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서다.
구석자리 앉아 세번째 관람
매니저는 특히 영화배우들이 모여 앉아 영화를 관람하게 될 ‘1관’ 입장권을 1장이라도 더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열여덟장만 더” 하던 매니저의 입에서 “한장만, 두장만 더”하는 아쉬운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이날 브이아이피 시사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저녁 8시30분 시사회 시작이 임박하자, 유지태, 전도연, 배두나 등 영화계 관계자들과 탤런트 김동현 등 김혜수의 가족들이 1관에 자리를 잡는다.
김혜수가 세개 상영관의 무대인사를 도는 십여분 사이, 1관은 이미 만석이 됐다. 김혜수가 앉을 자리마저 놓친 매니저는 아연실색 표를 구하느라 난리다. 하지만 김혜수는 톱 배우답지 않은, 혹은 너무도 톱 배우스럽게 태연한 말투로 “다른 상영관에서 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연배우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1관이 아닌 다른 상영관에서 빈 자리를 찾아 조용히 좌석에 앉는다. 앞서 이미 두 차례나 영화를 본 그다. 굳이 폼도 안나는 자리에 앉아 다시 영화를 보지 않고 쉬어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상태. 하지만 “내 영화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본다”는 이 노회한 배우는 단호하고 진지한 태도로 3관 구석자리에 앉아 다시 자기 영화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