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청바지 안 입기를 선언함, <대부>
2001-07-19

내 신변잡사와 관련해서 이따금씩 이상하달까 혹은 뭔가 남들과 다른 점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로, 50을 코앞에 둔 이때껏 청바지란 놈을 사서 걸쳐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평소 같은 면바지류 정도야 입고 다니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청바지만큼은 한번 사서 입어보겠다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해본 적이 없는 게다. 이를테면 우리 낫살쯤 든 축이라면 대학 시절에 청바지니 통기타니 하여 박정희 시절의 이른바 ‘청년문화’로 불리는 것들로부터 입김을 쐬지 않았던가. 왜 그런고 하여 곰곰이 궁리를 해본 결과 나름대로 그 이유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한편의 영화를 감상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스무살 무렵,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광화문네거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 <대부>(Godfather)를 본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영화를 좀 보는 축이라면 <대부>라는 영화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니 혹은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느니 하는 사정은 대강 알 터이다. 2편에서 3편까지 나왔지만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물론 1편이다. 혹시라도 TV의 외국영화 방영 프로에서 <대부>를 재방송이라도 할라치면 시간을 부러 여투어서 마치 향기를 탐하듯 화면에 흘러나오는 냄새를 음미하곤 하는 것이다. 기찻길 옆 한 허름한 카페에서 알 파치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든 상대편 패밀리의 보스와 그자와 내통하고 있는 뉴욕의 경찰 간부한테 검정 콩알을 먹이는 장면,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의 아프리카 수단산의 십만달러짜리 종마(그 말의 이름이 아마 카르툼이었지)의 목을 댕겅 잘라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침대에 집어넣어 그 제작자로 하여금 기겁을 하다 못해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장면 등등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의 미학, 피의 냄새가 영화 전체에서 질펀하게 넘쳐나고 있었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대부>의 마력은 주인공 돈 콜레오네 역을 맡은 말론 브랜도가 풍겨내는 풍미이다. 일부러 커튼을 내려 어둠침침하게 만든 방,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를 비추고 말론 브랜도는 자신의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 양키놈을 응징해달라는 청탁을 하러온 시실리 출신 사내를 접견한다. 손가락으로 입가와 콧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말론 브랜도의 음성과 몸짓. 거기에는 이른바 거부할 수 없는 권위의 아우라가 풍겨나지 않았던가. 요즘 젊은애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카리스마’가 따로 없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개 깡패두목에 지나지 않는 돈 콜레오네로 하여금 그토록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인물로 빚어낸 말론 브랜도의 연기란. 양쪽 볼에 크리넥스 티슈를 집어넣은 다음 아래턱을 일부러 내밀고는 목쉰 소리를 연기하는 이 배역으로 말론 브랜도는 당시 돈으로 물경 600만달러라는 거액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뒤로 두고두고 말론 브랜도를 생각해왔다면 생각해온 셈이다. 저런 매력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영화를 본 것이 1973년이니 가히 30년 동안을 말론 브랜도, 아니 돈 콜레오네에게 홀려온 이유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 옳다, 그거다. 이름하여 관록이라는 말. 말론 브랜도의 육중한 몸으로부터 풍겨나오는 체취, 온몸에 배어 있는 위엄과 무게. 몸에 배어 있다는 말에는 시간의 축적이 전제된다. 갑자기 불현듯 얻어지는 그 무엇과는 다른 질이 스며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록은 애송이나 풋내기와는 다른 품격, 시간이 부여한 녹인 셈이다. 게다가 관록은 돈꾸러미를 꿰듯이 몸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육화된 모양새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나는 박정희의 유신 시절을 장발단속에 초연한 채 거리를 ‘활보’한 셈이다. ‘청년문화’라는 것을 일소에 부치면서 말이다.

아아, 이렇게 해서 나는 청바지를 입지 않게 되었고, 이후로 산뜻한 가벼움 혹은 날렵함이라는 한쪽 날개는 영영 내 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로 경박함에 대한 혐오증이 고질적 병통으로 몸 안에서 자라났고,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무게를 갖추게 된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하지만 한 가지 위안으로 삼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가벼움이 판을 치고 뿌리 없음과 잔재주가 저 잘난 양 기승을 부리는 사회이니만치 그 맞은편에서 비록 둔하기는 하지만 무거움이라는 낡은 갑옷으로 무장을 한축도 한구석에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가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한술 더 뜬다면, 이런 자리를 빌려 앞으로도 청바지는 입지 않고 이 생을 마감하는 중차대한 결심을 표명하는 바이다.

유중하/ 연세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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