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러영화 <분홍신>의 김용균 감독
2005-07-07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익숙함을 따라가다 매력을 발견하는 것, 그게 장르영화 아닐까”

분홍 리본을 주워온 데서 시작됐다. 제작사인 청년필름 김광수 대표가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를 만나 모든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라고 적힌 리본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주워왔더니 영화사 직원들은 꺼림칙해했다. ‘아! 정체 모를 물건을 줍는 걸 사람들은 두려워하는구나. 특히 여자들이.’ 여기서 <분홍신> 기획이 시작됐고, 1년이 지나자 시나리오 3고가 나왔다. <와니와 준하>로 데뷔한 김용균 감독이 합류한 건 이때다. 호러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보이던 그를 제작자 역시 공포장치를 잘 쓰며 공포풍으로 찍어낼 수 있을까 불안해했다. 개봉을 일주일 앞둔 6월25일 기술시사가 끝나자마자 주연배우 김혜수가 감독을 포옹하면서 재밌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아침 8시였다. 배우가 기술시사에 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김혜수는 이른 시간에 ‘꽃단장’하고 영화를 지켜봤다).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는 김혜수는 좋은 건 좋다고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등에서 굉장히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이어서 주로 날카롭게 비판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러면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재미없었다는 건가. (웃음) 진짜 재밌게 본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는 냉정을 유지하다가 본인이 나온 영화에 흐려진 게 아닐까 우려도 됐는데 그렇다고 이 사람이 처음 영화를 하는 게 아니니 재밌게 본 건 사실인 것 같다.” 김용균 감독은 <분홍신>에서 대중을 향한 호흡조절에 좀더 심혈을 기울였고, 예상치 못한 장르의 선택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흥미롭게 쌓기 시작했다.

-수채화 또는 순정만화 같았던 <와니와 준하>가 호러를 만들 때 방해가 됐나?

=감독은 역시 자기 작품으로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것을 재밌게 확인했다. 처음에 날 잘 모르는 스탭들이 <와니와 준하>를 기준으로 판단해서 이러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작은 소품부터 미술적 색감 하나도 <와니와 준하>를 떠올리며 내 취향이 이럴 거다 하고 준비해왔으니까. 난 그게 아니었다. 공포영화이고 다른 영화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정서적인 부분에서 일치하는 게 있겠지만 그것 말고는 다 무시해달라고 주문했다.

-반대로 도움이 된 점은 뭔가?

=어떤 장르든 배우 내지 연기가 빛났으면 좋겠는 게 어쨌든 관객이 1차적으로 느끼는 건 배우의 눈빛이고 동일성이니까. 공포영화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배우와의 작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여기에 역점을 뒀다. 이건 한번 해봤기 때문에 좀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예쁘고 깔끔한 인공미가 너무 미술적이어서 몰입에 오히려 방해된다는 이도 있는데.

=그건 정말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세트 같은 인공적인 걸 싫어한다. 인공미를 철저히 줄이고 자연광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와니와 준하>를 100% 로케이션으로 찍었을 정도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가고 싶었다. 미술은 거칠다는 느낌으로 특히 과거의 예쁜 느낌과 대비시키고 싶었고, 연기 역시 거칠고 어두운 느낌과 핫한 느낌을 대조시키려고 했다. 인공적인 부분이 공포영화가 주는 자유로움 중의 하나라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굉장히 편해졌고 좋았다.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있어도 자연스러울 수 있고, 앞뒤 장면 연결에서 좀 튀어도 상관없으니까 굉장히 자유로워지더라. 관객도 리얼리티보다는 호러라는 장르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닌가.

-만들고 나서 느끼는 호러의 묘미는.

=호러만큼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또는 잠재된 무의식을 건드리는 장르가 없다는 것. 스릴러도 비슷한 과이긴 하지만 호러는 그것이 기본이자 전부다. 악몽을 다루니까. 자기가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고 자신도 뭔지 모르지만 강박적으로 느끼는 걸 표현하는 게 호러의 묘미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악마성은 분홍신이란 사물이 야기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있던 것을 분홍신을 빌미로 드러내는 건가.

=분홍신 자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도 지금 편집본은 전자에 맞춰져 있다. 굳이 감독의 의도라고 한다면 원래 인간이 악마성을 갖고 있다는 후자의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1차적 바람은 분홍신의 저주로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봐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이런 얘기하면 영화가 재미없어진다. (웃음)

-분홍신이 겉보다 정작 신으면 보이지 않는 신 내부의 꽃무늬가 더 고급스럽고 탐스럽던데.

=그렇게 봐주면 고마운 거다. 미술팀하고 디자인할 때부터의 바람이었으니까. 분홍신이 좀더 예뻐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데 훨씬 모던하고 감각적으로 만들었으면 보면서 금방 질렸을 거다. 처음부터 고민이 분홍신 자체의 이미지가 질리는 스타일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어떤 장면에선 은은한 매력을 풍겨야 하고 어떤 장면에선 무섭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자극적으로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중성적인 매력을 살려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분홍색도 여러 번 염색을 해서 만든 것이고, 신 내부의 문양도 여러 버전으로 디자인하고 중요무형문화재 분에게 부탁해 직접 손으로 뜬 값비싼 거다.

-왜 하필 과거 배경이 일제시대인가.

=과거 스토리만큼은 안데르센 동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살려보려고 했다. 소녀가 빨강구두를 신고 기독교의 금기를 깨는 모티브가 있어 성당을 배경으로 만들어보려고도 했다가 재미가 덜한 것 같아서 춤이란 코드에 더 집중하다보니 영화와는 상관없는 최승희가 떠올랐다. 사실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이미지를 우리의 과거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는데 최승희는 30∼40년대에 이사도라 던컨과 실력을 겨루는 모던한 무용수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하이힐을 신었고 의상도 고전무용과 다른 것으로 그 이미지가 지금봐도 너무 세련되고 매력적이어서 좀 빌려오려고 했다. 그래서 실재했던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고 일제의 군국주의적인 욱일기를 보여주면 악몽의 시작으로 적절하겠다 싶었다.

-‘왜 하필’ 하나 더. 지하철의 역사, 통로, 승강장, 선로 등 지하철 곳곳이 아주 중요한 배경으로 쓰인다. 왜 하필 지하철인가.

=과거와 현재를 극단적으로 충돌시키고자 했듯 또 하나의 내용적 충돌에선 도시라는 공간 이미지를 많이 가져오고 싶었다. 시나리오에 잘 묘사돼 있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공간이 지하철이었다. 어두운 철로 안에서 뭔가 기어나온다는 걸 상상하면 무섭고 이게 일상적 공포가 아닐까 싶었다.

-선재(김혜수)의 슬프고 착한 이미지는 <와니와 준하>의 와니(김희선) 이미지와 좀 겹친다.

=정서적인 공통점이 있을 테고 그러니 캐릭터에서 유사성이 있을 텐데 배우가 다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와니가 착하고 여린 캐릭터로 끝났다면 여기선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와니와 준하>에서 하다가 멈춘 건데 와니도 어떤 도발성이 있다. 예컨대 아버지 앞에서 이복동생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서 사고가 나고 아버지가 죽는다. 그런 면을 두드러지지 않게 감춘 건데 이건 공포영화이다보니 본성을 더 노골적이고 핫하게 보여주는 게 맞다. 속시원하고 쾌감을 맛보게 해줬다.

-혹시 착한 척하고, 슬픈 척 하는 것들에 속지말라가 진짜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좋은 말로 그걸 양가감정이라고 하더라. (웃음) 시나리오를 쓰고 다시 보니 역시 이런 면을 잘 표현한 게 <샤이닝>이었다. 큐브릭 선생님이 나중에 만든 <아이즈 와이드 셧>도 마찬가지고. 그런 걸 하고 싶었던 걸거다. 막말로 하면 내가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는데 난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많은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잘 까발리면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호러의 공식에 꽤 충실하다. 욕망 때문에 처벌받는다든지, 원혼이 풀린 것 같은데 다시 이어지는 최근 경향이 보인다든지, 이병우의 음악까지도.

=그렇게까지 진부하게 하느냐는 비판의 시선이 있을 수 있지만 감수하고 싶다. 마니아나 비평의 입장에선 싫겠지만 좀더 많은 관객의 입장에선 여전히 익숙함을 따라가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고 그 안에서 이 영화만의 매력, 신선함을 찾기를 바랐다. 그게 장르영화 아닐까.

-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멜로 코드가 있다.

=내가 재밌어 하는 것 같다. 액션을 해도 넣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왜 그렇게 멜로를 좋아하나.

=멜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연애를 충분히 못해봤거나 어렸을 적에 어떤 상처를 깊게 받았거나. 내가 남보다 특별한 건 없지만.

-가장 섬뜩한 건 분홍신을 놓고 모녀가 핏발 선 눈으로 다투는 게 아닐까. 여기서 모성은 온데간데없다.

=아이를 꼭 있어야 하고 안락하고 안정적인 체계로 가는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나아가 걸림돌이자 경쟁하는 존재로 상정했다.

-주인공의 스토리에 집중하는 전반부와 끔직한 악몽의 펼쳐짐에 집중하는 후반부가 좀 대조적이다. 선호도도 좀 엇갈린다.

=당연하다. 전반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좀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고, 반면 공포영화인데 자꾸 왜 딴소리하고 있지, 라고 할 수도 있다. 두 가지 다 일리가 있다. 영화의 라스트를 위해 수위 조절, 양조절을 한다고 했다.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장화, 홍련>하고 비교가 많이 된다.

=<장화, 홍련>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게 공포를 만드는 것이라면, 예컨대 <링>은 현대문명의 비판으로서 링 바이러스가 워낙 강력해서 캐릭터가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분홍신>은 여주인공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심리를 살려나가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장화, 홍련>과 닿아 있는 것이고, 정서로 끌고 간다는 점도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음악감독도 같고, 예쁘고 슬픈 느낌도 그렇고. 알겠지만 촬영, 미술 등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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