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웰컴 투 동막골>의 배우 임하룡
2005-07-08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선생님 보다 오빠, 형님으로 불리는 게 좋다”

지금은 영업을 쉬고 있는 2층 카페에서 임하룡을 만났다. 임하룡이 세운 이 청담동 건물의 지하는 라이브 클럽을 겸한 바이고, 그도 가끔 내려가 <딜라일라> 같은 옛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지하는 내 놀이터가 됐지 뭐, 여기는 비싸게 만든 응접실이고.” 생각해보면 임하룡은 언제나 놀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도 같았다. 책가방을 옆에 끼고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는 <추억의 책가방>, 핑크레이디 한잔하자면서 젊은 언니들을 쫓아다니던 <청춘을 돌려다오>, 대부를 꿈꾸지만 동생들과 장난이나 주고받는 게 현실인 <도시의 천사들>. 그리고 그는 이제 영화와 무대에서 그처럼 재미있게 놀고 있다. <묻지마 패밀리> <아는 여자> <범죄의 재구성>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이 몇년 안 되는 사이 몰아쳤던 그의 영화들. 임하룡은 그동안 혼자서만 튀어오르지 않으면서도 찰기있는 앙상블을 만들어왔지만 너무 잠깐 머물다 사라져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8월4일에 개봉하는 <웰컴 투 동막골>은 그를 좀더 오래 두고 만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장진 감독의 연극을 <묻지마 패밀리> 중에서 <내 나이키>를 연출한 박광현 감독이 이어받은 영화. 임하룡은 산골마을 동막골에서 우연히 조우한 북한군과 국군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는, 겁은 많지만 큰형 같기도 한, 북한군 하사 장영희 역할을 맡았다. 겨울바람이 피부를 찢는 것처럼 추웠던 강원도 야외세트에서도 유유자적하며 배우로서의 꿈을 잠깐 내비쳤던 임하룡. 그를 영화보다 한발 앞서 만났다.

-<웰컴 투 동막골>이 드디어 개봉하게 됐다. 연극부터 영화까지 오랜 시간이 들어간 작품이어서 감회도 남다를 듯하다.

=2003년에 연극에 출연했고, 영화 만들기까지 1년 기다렸고, 촬영은 일곱달 정도 한 것 같다. 하도 오래 찍으니까 등이 아파서 부황도 떴다. 나도 영화가 보고 싶어서 편집실에 갔더니 한두 장면 보여주고는 밥먹자면서 나가버리더라고. (웃음) <웰컴 투 동막골> 때문에 영화를 한편 놓치기는 했지만 연극을 할 때부터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내가 28회 공연을 하면서 스물여섯번을 울었으니까. 장영희가 나하고 좀 비슷하기도 하다. 소심하고 겁도 많고.

-방송을 쉬고 있던 도중에 연극 <웰컴 투 동막골>에 출연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던 건가.

=자꾸 반복하는 느낌이 있고 지치기도 해서 5년 전쯤 방송을 쉬기로 했다. 그런데 막연하게 연극을 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다가 장진 감독을 만났는데, 제작은 너무 복잡해서 나하고 안 맞는 것 같고, 역할 있으면 작은 거라도 하고 싶다 그랬다. 그래서 <묻지마 패밀리>를 먼저 하게 됐다. <웰컴 투 동막골>은 처음엔 지금 정재영씨가 하는 리수화 역을 달라고 했다. 내가 예전엔 보스를 많이 했잖아. (웃음) 그 다음엔 장영희 하겠다고, 난 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어(웃음), 그랬더니 그 역은 너무 어려워서 안 된다는 거야. 우겨서 했지.

-속상했겠다. 어려운 역이어서 안 된다니.

=그렇지. 장진 감독은 굉장히 독해서 연습 중에 질책을 심하게 했다. 내가 왜 연극을 한다고 해서 얘한테 이런 얘기 듣고 있나, 이런 생각도 했다. (웃음) 하지만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선생 노릇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박광현 감독에게도 많이 배웠다. 코미디도 연기지만 리액션의 방법이 다르다. 상대방이 연기하고 있는 사이에 다음엔 내가 뭘 할지 생각하니까 언어로 리액션을 주고받지만, 영화는 감정으로 리액션을 해야 한다.

-1980년대에 영화 몇편을 찍고, 신승수 감독의 <얼굴>에도 출연했지만, 지금 영화현장은 많이 달라졌다. 적응하기가 힘들지는 않았는가. <웰컴 투 동막골> 현장에선 그 추운 날씨에도 밤새 천막을 지키던데.

=<웰컴 투 동막골>은 왠지 거기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왠지… 일이 없어도 떠나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촬영 기다리는 사이엔 여기저기 이야기 걸고 다녔는데, 시골에선 내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 그동안 깔아놓은 게 있으니까. (웃음) 요즘 현장은 참 좋아졌더라. 예전에 선배들은 분장도 직접 했는데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배우로선 참 편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도 직접 의상이나 컨셉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던데.

=그랬다. <청춘을 돌려다오>는 의상비가 출연료보다 더 들었다니까. 그때 난리였지. 여대생들 쫓아다니면서, 그거 있잖아, 핑크레이디 한잔하자고. 소방차 패션도 내가 먼저 했다. 승마바지 입고 나왔더니 소방차가 그거 가져다가 똑같이 본을 떠서 만들어 입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의상이랑 분장 컨셉 잡는 건 참 잘했다. 대학 때 연극을 하는데 내 캐릭터가 허장강 선생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그 느낌을 살렸다. 연극을 보고 나온 교수가 너는 의상하고 분장으로 반은 먹고 들어갔다고 칭찬해주더라.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렸을 때부터 갈고닦아온 무언가가 있었을 듯하다.

=내가 학교를 좀 등한시했지. (웃음) 교복을 내가 직접 맞춰 입었다. 가위 들고 교복바지 자르고 윗옷 소매도 7부로 해서. 학생이 캉캉을 신고 다녔으니까 말 다한 거지 뭐. 캉캉이라고 춤출 때 신는 뾰족한 구두가 있는데 그 시절에 어떤 남자가 굽 높은 구두를 신었겠나. 선생들도 나중엔 포기하고 아무 말도 안 하더라. 극장도 자주 갔고, 쇼도 보러다녔다. 그때는, 요즘으로 치면 뮤지컬인데, 극장에서 쇼를 많이 했다. 돈이 없으니까 영화는 동시상영으로 보고. 불량학생이었겠지만, 나는 미리 실습하러 다닌 거라고 믿고 있다. 그때 허장강 선생이 참 좋았다. 강한 악역을 많이 했는데, 그분이 하면 악역도 참 재미있었다.

-영화를 좋아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는데 연기자로서 출발은 다른 곳에서 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학교를 2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97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는데, 남들은 다 제대로 졸업한 줄 안다. (웃음) 군대에 갔을 무렵 가세가 극도로 기울어서 그랬다. 극단에 들어가긴 했지만, 장남으로서 책임감도 있고, 밥벌이가 너무 절실해서, 밤무대 사회자로 뛰었다. 아르바이트로 정신병원에서 조수 겸 사이코드라마도 했고. 그때 업소에서 같이 일한 사람들이 전유성, 김학래, 손철…. 뭐 그렇게 해서 KBS에 특채로 들어간 거다. 나이 서른이 넘어 들어갔는데,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이런 쇼프로에서 콩트를 하면, 나보다 젊은 애들이 주연이었다. 주병진이나 이성미나. 나는 일본어로 오도시라고 마무리로 등장하는 역할이었고. 그러다가 <유머 일번지>에서 10분짜리 코미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전성기였지. <하룡서당> <변방의 북소리> <추억의 책가방> <도시의 천사들> 이런 주옥같은…. (웃음)

-먹고사는 일이 절실했다고는 해도 연기를 계속 하고 싶진 않았나.

=코미디도 연기니까 상관없었다. 그때 코미디는 지금하고는 달라서 드라마가 중요했다. 캐릭터 잡고 감정 잡고. 나는 개인기도 없으니까 진짜 연기만 했다. 사람들은 내가 연극도 하고 뮤지컬도 하니까 직업 바꾸었느냐고 묻지만 그건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다. 팬티를 팔든 잠옷을 팔든 옷장사는 옷장사 아닌가.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게 많긴 하다. 시트콤도 하고 싶고. 시트콤은 그 장르의 선구자격인 사람이 평소 점잖아 보이던 탤런트가 나오면 더 웃길 거라고 생각해서 탤런트를 주로 쓰는 것 같다. 나 역시 몇년 동안 방송을 쉬었더니 얼굴만 보고도 웃는 사람이 이젠 별로 없다. 앞으로는 더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영화 시나리오가 꾸준히 들어오지 않나. 고르는 기준이 있을 텐데.

=작은 역이라도 내가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고 입맛에 맞으면 괜찮다. 하지만 뜨뜻미지근한 캐릭터는 자신이 없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고모부 역이 그런 거였는데, 그거 참 어렵더라. 마음을 다 비워야 하거든. (웃음) 그 영화가 또 친척들이 떼로 나오지 않나. 내가 감독한테 경찰인데 근무시간도 없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다같이 나와야 한다고 하더라. (웃음) 내가 보기보다 보수적이다. <풀 몬티>는 어떻게 했나 몰라.

-<웰컴 투 동막골> 현장에서 <풀 몬티> 이야기를 꺼냈더니 “노래는 한곡밖에 안 했는데, 뭘…”이라며 쑥스러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그 노래가 진짜 어려운 거였다. (웃음) 흑인 음악이고 고음이 이어져서 부르기가 힘들었다. 춤까지 추면서 하려니까…. 그때 완전히 벗어야 하면 못하겠다고 했었지. 살색 티팬티라도 입어야 한다고. 그랬다가 살이 쓸려서 고생도 많이 했다. 결정을 하고 연습을 하려고 갔는데 같이 출연하는 배우들이 안 벗는 거야. 내가 제일 먼저 벗었더니 나중에 연출이 나이 드신 분이 솔선수범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웃음) 나중에도 난리가 아니었다. 공연하다가 틈만 조금 생기면 푸시업해서 가슴 근육 만들고. 나만 배나와서 나갔다. (웃음)

-<청춘을 돌려다오>를 악극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뮤지컬이나 영화로 만들고 싶은 아이템도 있다고 했었다.

=모여서 수다떠는 건 잘하지만 무언가 완성하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청춘을 돌려다오> <추억의 책가방>은 몇년 전부터 뮤지컬로 만들고 싶었다. 마침 어버이날에 적당한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누가 묻기에 <청춘을 돌려다오>를 제안했는데, 뮤지컬이라고 하면 어르신들이 안 오신다고, 악극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다보니 관객 연령대가 엄청나게 높아져서 전원주가 그 악극 최고 스타가 됐다. 주인공은 나하고 전유성이었는데. (웃음) 나 어릴 적에 놀던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나중에 <품행제로>를 봤더니 내가 만들고 싶던 영화하고 비슷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 해봐야 나는 배우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감독이나 제작자라면 몰라도. 머리 아픈 일은 못하는 성격이어서 그런 건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내가 젊어 고생을 했다고는 해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괜찮았지, 수금사원은 하루 해보고 관뒀다. 이 건물도 인테리어하고 개업 준비할 때까지만 재미있었고 영업 시작하니까 골치아프더라.

-예전부터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외모로 다양한 연령대를 장악했었다. 젊었을 적엔 나이들어 보였지만, 나이가 쉰이 넘은 지금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청춘을 돌려다오>를 할 때 내 나이가 삼십대 후반이었다. 노역을 많이 한데다가 남들보다 늦게 방송을 시작하지 않았나. 쑥스럽구만, 젊은 오빠야, 이런 유행어가 다 나이 어린 동료들하고 어울리다가 나온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어색하다. 연극을 하면 사십 다 된 배우들이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다가, 송은이 같은 애들이 오빠, 오빠 하는 걸 보면 깜짝 놀라지. 나도 선배한테 선생님 소리를 잘 안 해서 많이 혼났다. (웃음) 하지만 형님이 좋다. 존경하는 사이보다는 친근한 사이로 남고 싶으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느긋해진 것 같긴 하다. 젊었을 적엔 초조했고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했고 결정도 급하게 했다. 지금은 안 되면 일년 쉬지 뭐, 이런다.

-그래도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데.

=가을에 뮤지컬을 한편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우는 누가 찾아줘야 하는 직업 아닌가. 이제 젊은 감독들 찾아다니면서 나 좀 써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웃음) 연기는 앞으로도 쭉 하겠지. 연기가 정말 좋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액션에도 욕심이 난다. 몸으로 하는 거 말고 <대부>의 말론 브랜도 같은 역 있잖아. 하지만, 누가 써줘야 하는 일이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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