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간의 영화제 마지막 날. 지칠 만도 하건만, 영화제 관계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다음 상영 관람객의 티켓을 뜯어주면서도 조금 전에 끝난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한다. 필자도 영화제를 도운 경험이 있지만,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행사 마지막 날까지 영화 얘기를 하기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
처음으로 에이즈를 주제로 한 발리우드영화(<마이 브라더 니킬>)에서부터 ‘고질라’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미드나이트 몬스터영화(<고질라 파이널 워즈>)까지. 뉴요커들은 지난 6월17일부터 7월2일까지 개최된 뉴욕아시안영화제 2005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아시안 대표작 31편을 관람하는 기회를 가졌다.
<말아톤> <주먹이 운다> 포함, 58회 중 11회가 매진
지난 2002년부터 이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는 ‘서브웨이 시네마’는 페스티벌 준비 막바지에 자신들이 원하던 8편의 추가 작품을 확보해, 지금까지 행사를 가져왔던 이스트빌리지 남단의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외에도 미드 맨해튼의 ‘이매진 아시안 시어터’에서 릴레이 상영을 가졌다. 이중 일본 작품이 16편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 작품이 9편, 홍콩 3편, 중국 2편, 그리고 필리핀과 인도, 타이에서 각각 1편씩 소개됐다. 이번 행사에 초청된 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함께 소개됐다. 특히 영화제 마지막 작품으로 상영된 <주먹이 운다>는 매진된 것은 물론 상영 뒤 관객이 기립박수로 감독을 맞아 눈길을 끌었다. 이외에도 이정철 감독의 <가족>과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 공수창 감독의 <알포인트>,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 박찬욱·미이케 다카시·프루트 챈 감독의 <쓰리, 몬스터> 등의 한국 작품이 소개됐다.
영화제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행사의 총 58회 상영회 중 매진된 횟수는 11회다. 이중에는 세키구치 겐 감독의 <서바이브 스타일 5+>,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너구리 저택의 오페라>, 기타무라 료헤이 감독의 <고질라…>,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의 <녹차의 맛>,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마인드 게임>, 추안루 감독의 <커커실리>, 그리고 <쓰리, 몬스터> <말아톤> <주먹이 운다> 등이 있다.
‘서브웨이 시네마’의 창단 멤버이고 페스티벌 홍보를 담당하는 그레이디 헨드릭스에 따르면, 매진 작품들 중 세편의 성공이 가장 기뻤다고. 관객의 호응에 가장 놀란 작품은 당연히 <커커실리>. 헨드릭스는 “밀렵꾼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영화로 작품성은 좋지만 상당히 어두운 영화라 사실 소개한다는 데 의의를 둔 작품이었다”며 “그런데, 상영회마다 매진된 것은 물론이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이 서로 또는 영화제 관계자들과 그 작품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떠날 생각을 안 하더라”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작품은 <너구리 저택의 오페라>로 칸영화제 상영 뒤라 거의 기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크리닝 요청을 했는데, 하루 만에 허락하는 이메일을 받았다는 것. 헨드릭스는 “그뒤 우리보다 더 큰 규모의 영화제에서 스크리닝을 요청했지만, 영화사쪽에서 우리 영화제와의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칸영화제 화제작이 미국 내에서는 뉴욕아시안영화제에서 첫 소개돼 <뉴욕타임스>는 물론 <BBC>에서도 보도가 됐다.
마지막 작품은 <고질라…>. 멤버들이 모두 상영을 원한 작품이었지만, 상영료가 상당히 고액이라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다고(뉴욕아시안영화제는 대규모 스폰서 없이 ‘서브웨이 시네마’ 멤버들의 자비로 운영되고 있다). 멤버 중 한명이 상영료 전체를 부담하겠다고 나서, 큰 부담을 안고 라인업에 추가된 작품이다. 헨드릭스는 “모두 조마조마하면서 예매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고질라…>가 가장 먼저 매진이 돼 안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욱 주목할 점은 <고질라…> 상영회에 기존 아시아영화 관객이 아닌 힙합문화 관객이 대다수를 이루어 영화제 관계자들도 의아해했다고.
영화제의 결정적 후원자들
아시안 아메리칸 방송국 <이매진 아시안 TV>가 올 행사에서 극장 사용료를 받지 않고, 관객동원에 따라 이윤을 나누는 방식으로 뉴욕아시안영화제를 후원했다. 그리고 홍보와 일부 자본투자, 페스티벌 관련 자료 디자인, 배포 등도 도움을 주었다고.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 고정관객이 있었던 ‘서브웨이 시네마’는 올해 영화 편수가 갑자기 늘어나 미드타운 맨해튼으로 릴레이 상영을 하는 일종의 모험을 단행했다. 한 영화제 관계자는 “사실 관객 반응이 어떨지 걱정했었다”며 “하지만 예상외로 상당히 반응이 좋아서, 큰 이변이 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매진 아시안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올 행사에는 아시안 장르영화의 미국 내 배급사 타르탄 필름스가 <바이탈> <6월의 뱀> <사마리아> <알포인트> <마레비토> 등 5편을 영화제에 제공했으며, 이외에도 뉴욕한국문화원과 코리안 아메리칸 잡지 <코리앰>, 클로징 파티를 가진 ‘산도배 레스토랑’ 등 한국 커뮤니티의 지원도 컸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는 에릭 찰스 마틴 감독의 <가감보이>, 이와이 순지의 <하나와 앨리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가시마 데쓰야 감독의 <가미카제 걸스>, 시바타 고 감독의 <느린 남자>, 이동승 감독의 <왕각흑야>(One Nite in Mongkok), 쓰카모토 신야 감독의 <6월의 뱀>과 <바이탈>, 오니어 감독의 <마이 브러더 니킬>, 호시 마모루 감독의 <웃음의 대학>(University of Laughs) 등도 소개됐다.
지난 99년에 아시아영화를 사랑하는 미국인 5명으로 결성된 ‘서브웨이 시네마’는 2002년부터 뉴욕아시안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올드 스쿨 쿵후 페스트’(2000∼2001), ‘미이케 다카시 신작 소개: 미이케 마니아’(2002), 80년대부터 근래까지 홍콩 공포영화를 소개한 ‘인 더 무드 포 고어’(In the Mood for Gore, 2002), ‘서극 감독 회고전’(2001), 뉴욕한국영화제(코리안필름포럼 공동주관, 2001), ‘인크레더블 서브웨이 선데이스 영사회’ 등의 행사를 개최해왔다. 이들의 웹사이트(www.subwaycinema.com)는 <타임매거진>이 ‘베스트 무비 웹사이트’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화제 때문에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한 행사 관계자는 “즐겁다. 영화 마니아들은 좋은 영화를 보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나. 우리는 그 규모를 조금 더 크게 했을 뿐”이라며 웃는다. 매년 500여개의 아시아영화의 리스트를 만들어 영화제 준비를 하고, 올해도 이미 내년 라인업을 구상하고 있다. 행사를 막 끝낸 이들의 조그만 바람이 있다면 한동안 아무 생각없이 ‘자막없는’ 미국영화를 보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