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국에서 나를 포함해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는 사람들에게 스티븐 스필버그는 부인하고픈 이름이었다. 조지 루카스(<스타워즈>와 함께 착하고 멍청하고 보수적인 그러나 재미있는(그래서 위기의 할리우드를 회생시킨) 할리우드 롤러코스터의 대명사였고, 할리우드 문화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으며, 무엇보다 ‘예술로서의 영화’에 적대적인 블록버스터 멘탈리티를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레이더스>에서 요란한 동작으로 칼의 위용을 과시하는 아랍인에게 인디애나 존스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총을 쏠 때 그것은 은밀히 제국주의적 본성을 폭로했고,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라며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선의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미숙한 세계관의 징표였다. <후크>의 지치고 딱딱해진 어른은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아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전세계에서 통했다. 그는 더 부유해졌고 더 강해졌다.
그럴수록 그의 정신연령은 더 의심됐다. 잘 때도 양말을 벗지 않는다든가, 누가 큰 소리만 쳐도 코피를 흘린다는 등의 에피소드들도 뒤늦게 회자했다.(『헐리웃 문화혁명』, 피터 비스킨드) 세기가 여러번 바뀌어도 여전히 어울려 다니는 기독교, 유아적 휴머니즘과 가족주의, 제국주의는 부시의 것인 만큼 스필버그의 것으로 보였다. 비록 그가 빌 클린턴의 친구이며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라 해도.
<우주전쟁>은 난감한 영화다. 여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필버그가 없다. <미지와의 조우>의 외계인 친구가 내미는 따뜻한 손의 자리엔 사악한 외계세력의 학살이 들어서 있고, 영웅은 물론 선인들조차 사라졌으며, 결말은 불길하고 비관적이다. 물론 갑작스런 변화는 아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디스토피아적인 비전이 결국 지워지지 않았으며, <캐치 미 이프 유 캔>에는 숙명적인 비애의 공기가 스며 들었다. <터미널>의 해피엔딩에조차 내밀한 불안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어떤 영화도 <우주전쟁>만큼 삭막하고 무섭지 않았다.
스필버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의 본심을 짚어보는 건 헛수고일 것이다. 이야기꾼은 이야기 밖에서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혹은 그의 이야기는 자기도 모르게 종종 그의 본심을 배반한다. D. H. 로렌스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비즈니스맨의 길을 접고 예술가로 나섰다고 쉽게 말할 순 없다. 자기 집을 불태우고 거리로 나설 인물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우주전쟁>은 전세계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새로운 이야기가 9·11 이후의 동시대의 공기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9·11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마드리드와 발리와 런던의 것이며, 이미 서울과 부산의 것이다. 이 시대는 2차대전 직후가 그랬듯이 낙천적이고 헌신적이며 가족적인 영웅이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다는 거짓말의 효력이 바닥난 시대다. 거기에 더해 살육의 스펙터클이 뻔뻔스럽게 매매 되는 초유의 시대다. <우주전쟁>은, 1940년대의 필름누아르가 그랬듯, 미국 영화의 끈질긴 유전자인 낙천적 포퓰리즘이 마침내 그 성공적 계승자에 의해 부인당하는 중대한 분수령의 영화다.
스필버그의 탁월함은 갑작스런 예술가적 각성이 아니라, 소통 가능한 거짓말 작성을 위해 동시대의 공기를 탐지하고 흡수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면서 대중영화의 관습을 거의 파괴하는 위험한 지점에까지 밀고 간다. 그 순간 불현듯 미학적 비약이 일어난다. 미국영화의 위대성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방식으로 스스로 보고 싶은 미국 사회 그대를 보여주는 능력을 유지해왔다는 점”이다(앙드레 바쟁). 스필버그는 그 전통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다. 미국영화에서 먼저 배울 점은 시스템과 비즈니스 방식이 아니라 이런 능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