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중화권 거장들이 아끼는 청년, <에로스>의 장첸
2005-07-14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에로스> 중 왕가위 연출작 <그녀의 손길>의 배우 장첸

“물론 샤오장은 위대한 사랑을 지켜나가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진 건 그의 일생 중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어쩌면 샤오장은 약간 변태 성향을 지닌 인물일 수도 있고, 영화가 끝난 뒤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다.” <에로스> 중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그녀의 손길>. 희롱과도 같은 단 한번의 손길을 잊지 못하고, 길고 오랜 시간 사랑하는 여자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재단사 샤오장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이들에겐, 실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을 지닌 청년처럼 유약해 보이는 외모의 장첸은 더없이 이성적인 태도로 냉정한 현실을 말한다. 극장불이 켜진 뒤에도 지속될 영화 속 캐릭터의 인생을 통찰할 줄 아는 그는, 하염없이 아름다운 영화가 감추는 이면까지 직시할 줄 아는 신중한 배우였다.

장첸의 데뷔작은 아버지와 감독의 친분으로 출연하게 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여리디 여린 소년의 얼굴을 통해 폭력적인 시대의 그늘을 다룬 이 영화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죽인 동갑내기를 연기한 14살 소년의 인생은 이전과 다른 것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영화에 대한 막연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에드워드 양 감독의 사무실을 무작정 찾아 잡일을 거들었다고. 그 결과 에드워드 양의 <마작>이라는 영화에 다시 캐스팅된 이후 왕가위(<해피 투게더>), 리안(<와호장룡>), 허우샤오시엔(<최호적시광>) 등 그를 선택한 중화권 거장들의 리스트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열악한 대만의 영화 현실에서 영화 외의 것에는 한눈을 팔지 않으며 데뷔 이후 14년 동안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장첸은 “대만에서 TV로 옮겨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배우”. 본인은 정작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드라마를 찍지 않은 것일 뿐”이라지만, 한국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평범한(?) TV 스타가 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해피 투게더>에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만 인지됐던 그가, <와호장룡>에서 강렬한 눈빛의 마적단 두목으로 이름을 알릴 무렵, 그 옛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꼬맹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의 괄목할 성장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필모그래피 역시 비교적 긴 대답이 필요할 만큼 풍부하고 묵직하다. 대만의 젊은 감독이 연출한 <아이니 아이워>에선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외톨이”였고, 주성치의 <서유기>로 유명한 유진위 감독의 <천하무쌍>에서는 “코믹한 이미지의 천방지축 황제”였으며, 17살부터 70살에 이르는 폭넓은 연령대를 혼자서 소화했던 <우칭위엔>에선 “전설적인 바둑기사”였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장첸은 여전히 평범한 얼굴 어딘가에 남모를 사연을 간직한 듯한 인물로 익숙하다. <그녀의 손길>로 왕가위 감독과 세 번째 작업을 함께한 끝에 주연을 맡게 된 그는 분명, 양조위가 연기했던 왕가위 영화의 어떤 캐릭터의 계보를 잇는 듯 보인다. 이러한 감상을 들려주자 그는 쑥스러운 웃음 끝에 지난 작업을 회고한다. “왕가위 감독은 배우에게 특정한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의 행동과 반응에 대해 처음부터 조금씩 이것저것 시도한다. 그쪽에서 뭔가를 제시하면 이쪽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차츰차츰 한 인물이 완성된다.” 여기에 이들이 가장 먼저 찍은 장면이 샤오장과 후아가 은밀하고 당혹스런 교감을 나누는 첫 대면이었다는 사실은 사뭇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준다. “그 상황 자체가 워낙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민망하지 않나. 처음으로 만난 공리와 그런 장면을 찍는다는 사실이 영화 속 상황과도 잘 맞았다. 그 장면을 그렇게 찍었기 때문에 이후의 촬영 때도 감정이 순조롭게 이어졌던 것 같다.”

1박2일 동안의 짧은 한국 체류 기간 동안 장첸은 다섯 차례에 걸친 무대 인사와 방송을 포함하여 12군데 매체와 인터뷰, 그리고 화보촬영까지 살인적인 스케줄을 진행했다. 돌아간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출연 중인 스릴러영화의 촬영에 합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짙은 쌍꺼풀과 믿음직한 입매만큼이나 똘망똘망한 뒤통수가 인상적인 이 배우를 기다리는 평범한 일상이다. 다음날 일정을 염려하여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그에겐, <그녀의 손길>에서 몸소 보여줬던 격정적인 스킨십 따위는 기억에 없다. 오래도록 남아 있는 생생한 감각은 “첫사랑과 함께했던 산책길 어디에선가 마주잡았던 손의 느낌” 정도. 고민 끝에 찾아낸, 우리 모두의 경험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그 기억이 문득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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