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연출에 혼이 난 나는 다음 영화로 속 편하게 <어둠의 자식들> 속편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공부에 제작 신고를 하려면 당시엔 반드시 시나리오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 통과하지 못하고 자꾸 반려되었다. “내용이 어둡다” “사회의 어두운 면만 부각시켰다”는 게 반려 이유였다. 더욱 괴로운 것은 그 시절 한국영화 제작 독려 정책으로 해당 분기 안에 의무 편수의 영화 제작을 하지 않으면 외화 쿼터를 주지 않는 악독한 시행령이 있어 영화사가 줄기차게 나에게 계약 이행을 촉구하는 까닭이었다. 이른바 시한부 제작에 걸려든 것이었다.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양쪽에서 기계처럼 밀고 들어오는 철벽을 양팔 벌려 막아야 하는 악몽의 형국이었다. 그때 내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구멍은 그저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 포기마저 허락이 안 된다면 곱게 영화판을 떠나야겠다는 마지막 결단뿐이었다.
우선 영화 하나를 철저히 망쳐버릴 수 있도록 결심을 단단히 했다.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서 정말 뻔뻔스러울 정도로 모범적이고 아첨이 가득한 각색을 했다. 마치 지능이 덜 발달된 저능아를 위한 시나리오처럼 저의를 들어내보였지만 그래도 심의하는 쪽에선 그 저의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은 <어둠의 자식들> 2부의 영화제명을 허가해주지 않았으므로 20개 이상의 제목을 만들어 담당 직원이 마음대로 선택하게끔 준비했다. 그 중 제일 무난했던지 영화사에서 ‘바보선언’이라는 타이틀로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다음은 꼼짝없이 촬영으로 들어가는 순서였다. 그러나 무얼 어떻게 촬영해야 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도, 조감독도, 촬영기사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심의에 통과한 시나리오가 실제 촬영용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유있게 궁리할 수 있는 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바보 선언>을 내가 만든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독재 시대가 낳은 작품이다. <바보 선언>을 시작할때 나는 철저히 영화를 포기하고 그것도 아니면 영화판을 떠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제작사의 재촉을 받는 것도 넌덜머리가 나서 더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무렵 무작정 이화여대 앞으로 스탭을 모아 크랭크인을 했다. 단지 여주인공이 가짜여대생으로 행세하는 창녀라는 것만 이동철의 현장 소설 <어둠의 자식들>에서 익히 보았던 터여서 여자대학교 앞에 모이라곤 했지만 도무지 엉클어진 실 꾸러미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아 별 수 없이 학교 앞 풍경과 풍속만 기록 영화처럼 촬영했다. 연기자는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에서 처음 데뷔하여 대종상에서 신인상을 받은 이보희와 역시 같은 영화에서 광대 역으로 데뷔한 김명곤이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이 어떤 역을 어떤 성격으로 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스탭처럼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여자대학교 앞에서 실없이 며칠씩 시간을 보내며 그저 떠오르는 대로, 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촬영하다가 마침내 영화감독이 자살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면 연출에서 무책임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자 이야기의 앞과 뒤가 측량되었고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반역과 저항이 이 영화의 에너지가 되는 만큼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을 철저히 비뚤게 가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자, 반드시 반대로만 가자, 라는 오기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얼마나 상식과 정석에 길들여졌는지 일일이 인습에 반대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영화 <바보선언>은 그렇게 반항으로 시작했지만 중간 점검으로 촬영한 장면들을 모아놓고 편집을 시작하면서 점점 새로운 창작 의욕과 책임감이 높아져 갔던 작품이다. 어느 날 편집을 하던 원로 김희수 선생이 어쩌면 이 작품은 무서운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하면서 나는 애초에 포기했던 나의 모든 의지를 다시 힘들여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 완성 뒤 첫 시사회에서 제작자는 물론 지방의 배급관계자들과 극장주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영화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질 제작자만 남았고 다른 사람들은 20분이 지나도록 영화에 대사 한마디 나오지 않자 모두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다. 영화 <바보선언>은 완성되었지만 1년이 넘도록 햇빛을 보지 못하고 창고에서 썩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단성사의 펑크 프로로 일주일 시한부로 상영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게 그만 이변을 낳고 말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전회 매진이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순전히 대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일주일 상영기한을 넘겨 한달을 연장했다. <바보선언>은 지금처럼 21세기 어느 시점에서 어느 어린이의 옛 이야기로 영화가 시작된다. 타이틀 백이 끝나고 똥칠이 역의 김명곤이 하월곡동 달동네에서 다리를 절룩이며 나타나면, 지금은 스물넷이 된 내 아들이, 그때 겨우 한글을 깨우친 일곱살의 어린 목소리로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른다. “옛날 한 옛날, 20세기가 끝날 무렵에 우리나라에는 바보 똥칠이와 육덕이가 살았습니다….” 나는 <바보선언>을 내가 만든 영화라고 말하지 않는다. 독재시대가 만든 영화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