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숏컷] 보고 싶다! 심플하고, 직선적인 한국영화를
2005-07-1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바보선언>

처음 한국영화의 존재를 느낀 것은, <바보선언>을 만난 순간이었다. 고3 올라가던 첫날, 학교를 나와 종로3가의 단성사로 향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이장호가 누구인지도, <바보선언>이 어떤 영화인지도 몰랐다. 반드시 봐야 할 이유가 있었던 영화도 아니었다.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새로운 영화를 보러갔다. 아직 전회를 상영 중이었고, 휴게실에 앉아 있다가 친구가 먼저 들어갔다. 혼자 있기 심심해 따라갔다. 스크린에서는 여인이 죽어 산 위에서 제를 지내는 장면이 흘러갔다. 구슬픈 곡소리가 들리고, 남자 둘이 한 여인을 떠메고 갔던가. 이상하게도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뭔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처음부터 <바보선언>을 보면서 나는 ‘한국영화’란 것을 알게 되었다.

<바보선언> 이전까지,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도 없었다. <로보트 태권 V>나 <마루치 아라치> 같은 애니메이션은 좋아했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한국영화나 할리우드영화나 그저 똑같은 영화였다. 그저 보고 싶으면 봤고, 한국영화라고 별다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보선언>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바보선언>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할리우드영화와는 분명하게 다른 무언가가.

대학 시절에,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의 아세아극장에서 모 영화사의 창립 기념으로 걸작 영화제를 했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김호선의 <겨울여자>, 임권택의 <만다라> 등을 모두 그곳에서 보았다. 이장호의 재능이 데뷔작부터 만발했음을 알았고, <바보들의 행진>이 어떻게 시대와 충돌했는지도 보았다. 임권택의 <만다라>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하나인 김성동의 <만다라>가 교차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알았다. 한국영화에는 분명 다른 것이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나 궁극적인 인간의 조건은 같겠지만, 역사와 환경과 생활습관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국영화는, 지금 이곳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바보선언> 이후로, 한국영화의 존재를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이장호의 <천재선언>에 아무리 실망을 했다 해도. <씨네 21>의 초창기만 해도, 엉망인 한국영화를 왜 그리 많이 다루냐는 불만도 심심치 않게 있었지만, 상황이 역전된 지 오래다. 한국영화는 정말 성실하게, 자신만의 보법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앞으로도 잘 갈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이다. 그렇게 믿는다. 인도보다야 덜하겠지만, 가장 자국영화를 사랑하는 나라이고, 할리우드영화와는 확실하게 다른 감성이 존재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곳이다.

맞다. 분명히 그렇다. 확신을 넘어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요즘, 조금 의심이 간다. 한국영화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한국영화의 존재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 걸까? 그런 원초적인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영화계 내에서도 시끄러운 일들이 한창 진행 중이니. 일단 시스템 문제는 넘어가자. 그냥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요즘 한국영화들은 좌표를 잃은 게 아닌가, 란 생각이 든다. 김기덕이나 홍상수 같은 예술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그런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다.

나의 일차적 관심은 상업영화 혹은 오락영화다. 제작자와 감독은 대중이 좋아하는, 또는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고 관객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영화를 즐긴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영화에는 그런 기본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뭔가 치열함이 사라진 게 아닌가, 라는 생각.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생각 이전에, 이러저러하게 장치를 넣어주면 관객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자신이 원하는 심오한 ‘의도’를 과잉으로 집어넣고, 그러다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영화들. 그런 한국영화를 보는 일에 점점 지쳐가고 있다. 그냥 심플하고, 직선적인 한국영화를 보고 싶다. 이를테면 <범죄의 재구성>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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